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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Oct 07. 2016

12. 딥언더니아 - 2


 마지막 동굴을 벗어나자 두 개의 활활 타오르는 횃불의 보호를 받는 거대한 석문이 그 웅장한 자태를 맘껏 드러내었다.


 이안은 바로 문 앞에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들어온 난쟁이 무리와 또 다른 난쟁이들이 있었는데 모두들 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수진이 그들에게 다가가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아,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지하에 이런 문이 있을 수 있지?”

 

 문의 크기는 난쟁이라기보다는 거인 왕국에 온 것처럼 거대하고 으리으리했다. 웅장한 석문 표면에 외지인이 알아보기 힘든 괴상한 쐐기문자 같은 것이 문 테두리를 따라 돌아가며 잔뜩 적혀있었다. 고대 룬문자였다. 테두리 안에는 별들, 태양과 달이 군데군데 새겨져 있었다. 새겨진 별 하나가 그녀의 머리 크기와 맞먹었으니 다른 것들이 얼마나 컸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안과 수진이 문 앞에 서서 구경하는 동안,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 난쟁이가 무리에서 두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딥. 딥언. 딥언더. 딥언더니. 딥언더니아. 딥언더니아. 딥언더니아. 딥언더니아. 딥언더니아!” 


 그는 혹시 틀렸을까 봐 조바심이 난 나머지 앞의 난쟁이를 붙잡고 다짜고짜 물었다.


“내가 끝에 ‘딥언더니아’를 총 다섯 번 불렀지? 그랬지? 맞게 했지?”


“네. 역시 이처럼 힘든 일에는 숙련된 분이 제격이라니깐요.” 


 젊은이의 칭찬에 만족스러운 듯, 이빨이 여러 개 빠져 거무죽죽한 잇몸을 드러내어 그가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였다. 그때까지 문 앞에서 서성이던 이안과 수진을 발견하고 그는 인상을 팍 쓴 채 그들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이놈들아! 죽기 싫으면 얼른 뒤로 물러나란 말이야! 물러서!”


 그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때였다. 체인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석문이 바깥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신속한 속도로 다가오는 육중한 문에 깔려 쥐포가 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죽을힘을 다해 달려야 했다. 가까스로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문 안에서 갑옷을 입고 쇠도끼를 치켜든 딥언더니아 경비병이 나타났다. 그는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내면서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크게 외쳐댔다.


“자, 검문을 할 것이요. 지나가시오. 어이 거기, 키 큰 외국인들 이리 좀 와보소!” 


 명목상 검문을 하겠다고 했지만 키 작은 난쟁이들은 그냥 보내주었다. (사실 작은 체구와 외향 자체로도 이미 국적이 너무 분명하지 않은가?) 


 옆으로 따로 불리어진 수진과 이안은 여권을 제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리고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28가지의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다. 그녀가 받은 질문들 중 가장 황당한 것 하나를 여기에 풀어보겠다.


"딥언더니아 여자들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턱수염이 나기도 하는데, 너도 똑같은가?"


 그녀는 확실한 어조로 절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경비병은 다음 석문으로 가라며 그들에게 여권을 되돌려주었다.  


 다음 문은 이전 것보다 작은 크기였지만 겉면에 장식된 무늬는 확연히 달랐다. 

 거인족과 전쟁을 치르는 난쟁이들, 아니 정식 명칭으로 딥언더니아인들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었다. 바람에 횃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 위치가 바뀌면서 마치 그것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눈을 크게 치켜뜨고 입을 벌려 혀를 확 내밀고 있는 용맹스러운 딥언더니아인들이 얼마나 무섭게 달려드는지 웅크린 거인들의 표정이 가히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석문의 양쪽으로 세워진 높은 기둥들에는, 그것들을 칭칭 감으며 내려오는 뱀 조각이 각각 있었는데 혀를 내민 채 노려보는 두 마리의 시선이 양쪽에서 수진의 배꼽을 향하였다. 경비병이 그녀의 오른쪽으로 다가와 돌출되어 있던 뱀 머리를 옆으로 확 비틀자, “찰칵”소리와 함께 문이 양 옆으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난쟁이들이 사는 지하왕국 '딥언더니아',


 소문이 자자하던 그 찬란한 모습을 마침내 드러내려는 순간이었다. 


 딥언더니아 왕국의 중심에는 로마 콜로세움 같은 원형 광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광장의 천장을 받치는 대열주(大列柱)들이 얼마나 높고 까마득한 지 마치 이곳에 들어온 그들이 개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회색 암벽을 깎아 만든 천장에는 수백 개의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물결 같은 배열을 이루며 한껏 화려함을 뽐내었다.

 

 천장을 받치고 있는 천 개의 원기둥들이 밟고 있는 바닥면에는 파란 타일이 촘촘히 깔렸는데, 군데군데 하얀 타일로 달이나 별 모양을 만들거나 노란 타일로 태양이 그려져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담긴 거대한 구리 접시들이, 용맹한 전사의 모습이 새겨진 원기둥들 꼭대기에 매달려있어 이곳의 웅장하고도 장엄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한층 강조하였다. 


 수진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안, 저기 좀 봐봐!”


 그가 천장과 바닥에서 눈을 떼어 정면으로 보이는 원형광장의 벽을 쳐다보았다. 돌출된 좁은 길이 둥근 벽을 타고 빙빙 두르면서 천장을 향해 끝없이 올라가고, 그 길 뒤로 각양각색의 문과 창문이 벽면을 따라 쭉 박혀있었다. 각층의 다양하고 수많은 문이 동시에 열리고 닫히면서 딥언더니아인들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멀리서 보니 흡사 벌집을 들락날락하는 꿀벌들 같았다. 


 붐비는 광장을 바라보면서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감격과 기쁨으로 살며시 떨리었다. 


“수진, 드디어 온 거야. 오랫동안 숨겨져 왔던 지하왕국 딥언더니아에 정말로 온 거라고.”     


 그때 우란이 불쑥 옆으로 다가왔다. 아까 검문소에서 헤어진 이후 여태껏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광장 왼쪽을 가리켰는데 그곳에는 내부가 반짝거리는 터널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녀가 재빠르게 말했다.


“저곳이 왕이 사는 소금궁전으로 가는 길이야. 그 길에 캠프 등록처가 있어.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


 허리를 구부린 수진이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어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그녀는 바로 떠나지 않고 계속 엉거주춤 곁에서 꾸물거리는 것이었다. 수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에게 뭐 더 할 말 있니?”


“저기, 내 바구니는 돌려줘야지. 네 친구 손에 들고 있는 것 말이야.”


 깜짝 놀란 이안이 그제야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일국의 왕자였던 자기가 옥수수 바구니를 들고 있는 모습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지만 이미 벌어져 부정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밭에서부터 지금껏 계속 들고 다녔던 것이다. 


 그의 얼굴이 순간 빨개지더니 그것을 우란이 아닌 수진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광장 안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수진이 대신 그녀에게 되돌려주며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를 쫓아갔다.




 딥언더니아인들은 광장을 걷고 있는 키가 큰 외국인들에게 호기심이 생기는지 흘끔흘끔 그들을 쳐다보며 지나갔다. 어린아이들은 아예 가던 길을 멈추어 동물원 사자를 보듯 그들을 뚫어져라 관찰하기까지 했다. 수진이 먼저 말을 걸고 손을 흔들어주자 그들은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순식간에 도망쳐 버렸다.

 

‘이상한 아이들이야.’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란히 걷고 있는 이안은 아무 말 없이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혼자 깊은 사색에 잠겨있었다. 고대 룬문자를 새겨놓은 웅장한 기둥을 지나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때늦은 후회가 물씬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룬문자를 좀 배워둘걸. 공부할 때 괜히 게으름을 피웠어.’


"앗!"


 옆에서 수진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주춤하더니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강한 충격으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녀의 온몸이 부르르 떨리었다.


“갑자기 왜 그래?”


 그는 물으면서 그녀가 바라보던 기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만 흠칫 놀라 세 번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이내 다시 앞으로 걸어 나오며 그가 흥분한 어조로 떠들었다. 

 

“저건, 그냥 기둥 조각이야, 수진. 진짜 전사들이 아니라고. 근데 진짜 같잖아?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정말 신기하네.”


 문제의 기둥에는 갑옷을 갖춰 입고 도끼를 쳐든 딥언더니아 전사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용맹하게 뛰어나가는 모습이 위아래로 생생히 조각되어있었다. 그런데 그 위로 횃불의 빛과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흡사 그것들이 기둥에서 튀어나와 그들을 향해 돌진해올 것만 같은 착시현상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어 몇 초간 더 관찰하고 나서야 겨우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광장의 중간쯤 왔을 때였다. 이안의 귀에 익숙한, 그러나 너무나도 증오하는 목소리가 불현듯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잊고 지냈었는데 그의 가슴은 분노의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올랐다. 그는 벗어나려고 온몸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오래 전의 회상으로 빠져들었다.




“왕자님, ‘딥언더니아 왕국’  역시 삼천 년 전에 ‘블랙수트’와의 전쟁에서 우리와 함께 피를 흘린 동맹이자 친구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나라도 그들이 가진 건축술과 금속 공예, 석공 기술을 따라잡을 수는 없답니다. 그러니 그들도 브라잇 동맹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그에 합당한 존경과 존중을 받아야 하고, 그들 역시 그것을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요구할 권리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와 외모 면에서 다를 뿐, 그 안에 든 내면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이안 왕자님, ‘다름’은 잘못되거나 틀린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 말을 잘 기억해주십시오. 앞으로 누구를 만나시든 어디를 가시든, 외양이 아닌 내면으로, 즉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드러나는 겉모습이 다는 아니니까요.”


 오래전 그날도 이안은 일룸니아 궁전의 도서관 서재에서 어느 때처럼 와이즈맨에게 직접 수업을 받는 중이었다. 실내를 밝히는 수백 개의 초가 꽂혀있고 스스로 공중 부양하는 샹들리에 바로 밑으로 그가 앉은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평상시처럼 낮고 엄숙한 어조로 말을 마친 와이즈맨이 그의 의자 옆에 서 있었다. 

 부슬비가 창을 때렸다. 서재는 낡고 칙칙한 책 냄새로 가득하여 아늑하면서도 묵직한 분위기로 실내를 가라앉혔다.

 

 그날의 주제는 ‘딥언더니아’였고, 이안의 앞에는 두껍고 묵직한 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와이즈맨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 척 까불거리는 태도로 앉아있었다. 그러다 한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뜸 반격을 시도했다.


“그래도 난쟁이는 난쟁이야. 당신만 빼고 다들 그냥 난쟁이, 난쟁이 왕국이라고 부른다고. 이 사진 좀 봐봐! 어쩜 이리 못생기고 험상궂어 보일까? 단순 무식하고 아마 고집도 보통이 아닐 거야. 앞으로 삼천 년이 더 흐른다 해도 그들에게 손톱만큼의 존경심 같은 건 절대 생기지 않을 것 같다고.”


“잘 보셨습니다. 그들은 고집이 아주 셉니다. 성격도 거칠고 남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지요. 황금에 대한 욕심 또한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런 점들이 그들이 가진 많은 장점을 다 가리지는 못할 겁니다. 그들은 한번 약속을 하면 목숨을 걸고 끝까지 지킵니다. 전쟁에 나가면 죽음을 무릅쓸지언정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지요. 왕자님도 잘 아시다시피 그들의 용맹함이 결국 거인들까지 무너뜨렸지 않았었습니까? 

 그리고 한번 우정을 맹세하면 평생 친구가 되어줍니다. 뭐, 먼저 배신을 하면 최악의 경우 피의 복수를 한다는 소문도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지하에 건설한 ‘딥언더니아 왕국’은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매우 훌륭하고 웅장하답니다. 한마디로 굉장히 신비스러운 장소이지요.” 


“마치 자네가 직접 갔다 온 것처럼 말하네?”


“네, 맞습니다. 만약 기회가 되신다면 꼭 그곳을 방문해보십시오. 직접 보시면 왕자님도 그들은 그저 난쟁이라 부르지 못하실 테니까요.”




 몸을 부르르 떨며 회상에서 깨어난 이안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었다. 여전히 붐비는 광장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회를 이용해 마음껏 그들과 왕국을 관찰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오게 된 것도 일룸니아의 왕자로서의 숙명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 이상 독선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서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리라.’


 그는 굳게 다짐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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