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가상현실)의 가능성을 직접 체험해보았다.
2017년 8월 15일 광복절 아침, 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바쁜 걸음을 옮기었다. 비가 하루 종일 주룩주룩 내리던 날이었다. 가는 중에 운동화와 양말이 다 젖어버렸다.
왜 비를 헤치며 갔는고 하니 바로 미술관에서 하는 전시 중에 VR(가상현실)과 관련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멀티프로젝트 홀에서 캐나다 VR 영화를 상영한다는 것이었다. 난 VR, AR(증강현실)에 관심은 많아도 여태껏 한 번도 체험을 한 적이 없었기에 이날은 벼르고 벼르며 미술관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난생처음으로 VR경험을 하기 위해. 얼마나 새로운 경험인가 몸소 체험해보기 위해서.
내가 보려던 작품은 다음과 같다.
11시에 도착했지만 내가 보길 원하던 VR영화는 현장 예약을 해야만 한단다. 제일 빠른 오후 4시로 예약을 걸어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점심 먹고 띵깡 띵깡 거리다 시간 맞춰 다시 미술관으로 돌아갔다. 운이 좋게도 광복절은 무료 관람이기에 두 번 왔다 갔다 해도 무료였다. 관람비 4천 원을 아낄 수 있어 뭐, 비 뚫고 간 보람은 있었다.
내가 보려는 작품은 아래와 같다.
즉 위의 설명을 쉽게 풀자면,
온타리오 미술관에 소장된 16세기에 만들어진 고딕 양식의 기도 묵주 내부를 3D 프린팅 하여 실물 크기의 복사본을 만들었고 (아래의 사진처럼) 그 안에 마이크로 CT와 VR을 설치하여 묵주 안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게 만든 작품이다.
캐나다 필름센터 미디어랩과 세네카 아트&애니메이션 칼리지가 공동 제작하고 온타리오 미술관의 복원 담당 리사 엘리스와 인터렉티브 아티스트이자 감독디자이너 프리암 기보드의 예술과 기술협력에 힘입어 이 경이로운 작은 세계 안을 탐험할 수 있도록 작업하였다.
Creative &Technical Director : Priam Givord
Producers : Ana Serrano, CFC Media Lab; Mark Jones, Seneca
<MMCA필름앤비디오 브로셔 참고>
나무 묵주가 여러 겹 레이어들로 이루어졌다는데 참고로 묵주의 크기는 대충 호두보다 조금 더 컸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의 손으로 저리 작은 안을 세밀히 조각하였는지 보고도 무척이나 놀라웠다. 내 시력으로는 속의 겉면이 오돌토돌할 뿐 모양조차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돋보기로 봐야 할 것 같았다. 온타리오 미술관 사이트에 가서 찾아보니 원본의 레이어들이 아래와 같단다. 와우, 놀랍도다~
4시 정각이 되자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난 어두운 암실 복도를 지나갔다. 체험은 예약한 한명만 하게 되며 인도자 한 명이 안에서 대기하고 있단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가는데 슬그머니 겁이 났다. 누구는 VR 체험을 한 후 어지럽고 멀미가 났다는데 나도 그러면 어쩌나 걱정이 되고 무섭기도 했다. 긴장만 하면 생기는 이 울렁증은 어쩔 것인가? 순간 괜히 왔나 싶어 돌아갈까 망설였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총 관람시간 20분만 견디면 된다. 드디어 체험장에 도착했다. 저 어둠 속 어디선가 몸을 감추던 인도자가 쓱 나타나더니 날 불렀다. 매우 친절해 보이는 여자분이셨다. 그분은 나에게 삼성 VR HMD을 눈에 꽉 조이게 쓰라고 했다. 근데 완전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손안에 든 이게 뭔가? 완전 방독면 같았다. 군대 화상방 훈련할 때 쓰는 그것과 거의 흡사했다. 그리고 무거웠다. 머리에 쓰자 너무 묵직해서 자꾸만 앞으로 흘러내렸다. 조여도 계속 헐거웠다. 불편했다.
그러나 어쨌든 쓰자 내 눈 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사방으로 바둑판 바닥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스크린을 참고하시라. 그리고 내 앞에 커다란 시계 같은 게 허공에 벙 떠있었다. 바로 묵주였다. 그런데 그게 내 키 만했다. 붉은 레이저로 형체가 이루어져 처음엔 TV의 지지직 실선 같은 게 조금씩 비치는 게 조금 엉성한 것 같았다. 그런데 계속 보다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다양한 형상들이 동그란 묵주 안에서 서로 뒤엉키어 울퉁불퉁 실감 나게 튀어나와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처럼 말이다. 붉은 레이저 형체들이 초반엔 조금 무섭긴 했다.
인도자가 나의 손에 리모컨을 쥐어 주었다. 묵주 위를 올려다보란다. 세상에나, 묵주 위 허공에 노란 글씨로 네 개의 창들이 떠 있었다.
EXPLORE COLLECT SIDE1 SIDE2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며 SIDE1을 조준하라고 했다. 내가 버튼을 누르자 리모컨에서 노란 광선이 앞으로 품어져 나왔다. 순간 스타워즈의 광선검이 떠올랐다. 이리저리 움직여보자 정말 따라왔다. 광선 끝이 SIDE1을 향하자 짜짠~ 내 눈앞에서 묵주가 분리되기 시작했다. 무슨 시계 속의 기계장치처럼 말이다.
분리된 두 단면을 내가 직접 돌아다니며 앞과 옆 천장과 바닥 뒤를 다 살펴보았다. 인도자가 꿇어앉아서 가장 아래쪽의 악마 괴물이 벌린 입 안을 들여다보랜다. 사자같이 생긴 괴물이었다. 입 안으로 목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지옥(Hell)이란다. 그리고 묵주를 그대로 통과해서 안을 구경하란다. 처음엔 통과해도 되는지 주저했지만 인도자의 손을 잡고 묵주를 통과했다. 통과하면서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내가 젤리 속을 통과하는 듯 아님 유령이 되어 사물을 그대로 통과하는 것만 같았다. 둥근 묵주 안에서 잠시 몇 초 머무르며 둘러보기도 했다.
이어 나보고 EXPLORE를 리모컨으로 누르란다. 그대로 하자 짜잔~ 묵주가 위의 온타리오 박물관 사진에서처럼 레이어들이 짜자작 펼쳐지며 분리되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앞뒤로 펼쳐진 레이어들을 내가 통과하면서 살펴보란다. 그래서 제일 밑의 레이어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장미창들이 뚫린 화려한 껍데기까지 안과 겉을 샅샅이 살피며 그대로 통과했다.
놀라운 점은 저 호두만 한 묵주 안에 조각된 인물상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다 틀린 것이었다. 지옥에 떨어진 인물은 찡그리고 있고 천국에 있는 자는 웃고 있었다. 가운데 예수님도 빛을 품어내시며 생생히 살아계셨다. 천사들이 나팔을 입 앞에 대어 불고 있었고 천국의 별에서 넓은 후광이 아래로 내비쳤다. 내 머리 위에도 떨어졌다.
리모컨의 광선으로 각각의 레이어를 갖다 대자 어머나, 선택된 레이어가 순간 붉은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면서 옆 허공에 관련 설명이 떴다. 각각의 레이어마다 다른 설명들이 왼쪽 오른쪽으로 생겨났다. 공부가 저절로 되는 것 같았다. 아니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생생한 공부였다.
마지막으로 COLLECT를 누르자 펼쳐졌던 레이어들이 후다닥 합쳐졌다. 내가 다시 묵주를 통과해 뒤로 갔다. 문득 몸을 돌리지 않고 그 방향으로 잠시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바둑판 지평선이 끝이 안 보이게 펼쳐져 있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저기서 걸어오면 깜짝 놀라겠는데. 왠지 섬뜩하네.'
관람은 거기서 끝이 났다. 무거운 헬멧을 벗고 나오는데 마치 이상한 세계를 잠시 갔다 온 것 같은 기분과 함께 가슴속으로 느껴지는 뭔가가 있었다.
'앞으로 교실에서 교과서가 없어지겠구나. 저렇게 생생하게 공부할 수 있는데 왜 책이 필요해?'
'사전 같은 것도 필요 없겠다. 저렇게 직접 보여주는 게 낫지. 문장보다 더 생생하니까. 오늘 16세기 묵주는 제대로 공부했는걸.'
'앞으로 해외여행을 꼭 갈 필요가 없겠다. 저것처럼 여행지를 가상현실에서 보여주면 실제 온 것 같겠는데. 맨날 실제로 가면 가까이 접근하거나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데 가상현실은 벽 통과도 가능하잖아. 어쩌면 바티칸 시티의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지된 지하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해 볼 수도 있겠는걸. '천사와 악마'책에서 보니 도서관이 진공상태라는 데 뭐 가상에선 전혀 문제가 될 게 없잖아.'
'게임업계에서 더 생생하게 VR 게임을 만든다면 정말 빠져들겠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얼마나 흥미진진하겠어?'
오늘 VR 체험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주 할만하다.
난 앞으로 작가가 책을 팔아 먹고사는 시대는 끝이 났다고 본다. 미래의 작가는 그들의 상상력을 팔아야만 한다. 기업에게, 아님 국가나 사회, 아님 개인에게라도. '브라잇 동맹'을 연재하고 있는 나는 어떻게 내 스토리를 기술과 연결시켜 더 많은 시너지를 낼 수 있을까 종종 고민을 해본다. 그래서 다양한 IT기술 관련 강연이나 콘텐츠 관련 세미나를 힘든 몸을 이끌며 발품 팔아서 쏘다니는 것이다. 물론 VR이나 AR기술이 제작하는 데 돈이 많이 들긴 들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난 그것이 품고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경험하였고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브라잇 동맹을 VR로 만들어 전 세계의 수많은 판타지 팬들을 초청한다면, 그들이 휴가 때 해외여행을 외국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브라잇 동맹 안의 난쟁이 왕국 '딥언더니아'의 원형광장에서 잠시나마 보낼 수 있고, 아님 제4권에서 만날 중국 청나라 건륭게45년인 1780년의 '열하'가 재현된 VR속으로 몇 시간이나마 시간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그곳에는 지금껏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드래곤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인어가 손짓하는 등 흥미진진한 모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VR여행사'라, 음 멋있게 들린다~
또한 앞으로의 기술은 생태계(Ecosystem)나 플랫폼 구축이 무척 중요해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스토리로, 이야기로, 콘텐츠로 그것을 짜나 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계속 이어지고 연결되는 이야기는 그것만으로도 가능성이 충분하니까. 아마존 프라임이나 디즈니, 넷플릭스를 보라! 아직 미국의 콘텐츠 기업들이 전 세계를 호령하며 나아가고 있지만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동양판 디즈니가 나올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그리고 나도 그 일의 중심이 되고 싶다. 앞으로 IT 기업들이 그런 도움을 받거나 자신들의 성장동력으로 만들기 위해 분명 콘텐츠 개발에 뛰어들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작가, 아니 예술가들이 끼어들 수 있는 틈이 생길 것이다. 그걸 노려야 한다!
잠시나마 이런 엉뚱하고 담대한 상상을 떠올리며 걸어갔다. 젖어서 물이 첨벙거리는 운동화를 기쁜 마음으로 질질 끌어 버스정류장으로 향하였다. 내 마음과 달리 비는 계속해서 내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