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롱의 오전 강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입장할 때 그의 왼손에는 어제와 같이 기다란 수염이 둘둘 말려 있었다. 그는 교실 중간에 위치한 책상 위로 올라가자마자 수염 더미를 풀어 바닥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살짝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그는 오른손으로 수염 속을 뒤졌다. 쇳조각 분필이 튀어나왔다. 그것으로 허공에다 뭔가를 적었다.
다크 동맹 브라잇 동맹
그는 분필이 들린 손을 내리지 않은 채 그대로 동작을 멈추더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몰래 자다가 들킨 사람처럼 그는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흠흠, 오늘은 블랙수트마키아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 흠흠, 우선 마왕 블랙수트가 이끈 ‘다크 동맹’에 대해 알아보자꾸나. 흠흠. 다른 건 몰라도 그래도 이 방면이 너희에게 가장 친숙하겠지? 흠흠, 다크 동맹에 포함된 괴물들을 아는 자?”
수진을 제외한 대부분이 손을 번쩍 들었다. 각자 알고 있는 답을 크게 외쳤는데 목소리들이 한데 섞이어 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실크롱은 이 뜨거운 열의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그나마 덜 열성적으로 손을 든 우란 미스가를 짧은 마디의 손가락으로 콕 찍어 대답할 기회를 주었다. 그녀가 수줍은 어조로 대답했다.
“이마 중앙에 눈이 하나만 달린 거인족인 ‘키클로프스’요.”
“맞다, 흠흠, 거인들은 대부분 다크 동맹에 들어갔지. 흠흠. 키클로프스 말고 또 다른 거인을 아는 사람? 흠흠. 아마도 딥언더니아 출신인 카할이 잘 알 거 같은데.”
“백 개의 팔을 가진 ‘브리아레오스’과 눈과 입에서 불을 품어내는 ‘티폰’, 그리고 눈이 마주치면 바로 몸을 마비시켜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외눈의 소유자 ‘발로르’요.”
자신감 넘치는 카랑카랑한 그의 목소리에 실크롱의 얼굴은 더욱 활짝 펴지었다.
“그래, 흠흠.. 딥언더니아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게지. 흠흠.. 왜냐면 거인은 이곳 동화책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이거든. 히히히.”
그가 낄낄거리자 턱 밑에 붙은 수염들이 위아래로 뱀처럼 꾸불거렸다. 수진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같이 따라 웃었으나 그녀에게는 다 외계어로 들려올 뿐이었다.
그는 ‘다크 동맹’과 ‘브라잇 동맹’ 사이에 수직선을 길게 그어 칠판을 이등분하더니, ‘다크 동맹’ 제목 아래로 ‘거인족 키클로프스, 브리아레오스, 티폰, 발로르’를 차례로 써 내려갔다.
“흠흠, 딥언더니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화책 제목이 뭔지 아나? 바로 ‘키클로프스와 키키’야. 흠흠, 내용은 다음과 같지. 흠흠, 딥언더니아 소년 ‘키키’는 어느 날 산에서 외눈박이 거인 키클로프스를 만나지. 흠흠, 그들은 일주일 동안 함께 지내며 모험을 한단다. 흠흠, 부모님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로 아쉬운 작별을 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끝이 나지. 흠흠, 그러나 동화책은 동화책이야. 흠흠, 사실 키클로프스족은 난폭하고 잔인하다고 알려져 있다.
흠흠, 다음으로 인기 있는 동화책은 ‘브리아레오스는 아이들과 잘 놀아요.’란다. 흠흠, 8명의 아이를 가진 가난한 부부가 옥수수밭과 광산으로 일하러 집을 비워야만 하자, 백 개의 팔을 가진 거인 브리아레오스가 유모로 자청해 들어오지. 흠흠, 그의 수많은 팔에는 기저귀, 동화책, 우유병, 찐 옥수수, 장난감 등이 한가득 들려있어 아이들의 무섭도록 계속되는 요구에 즉각적으로 대응해주었단다. 흠흠, 밤늦게 부부가 돌아왔을 땐 8명의 아이들이 아주 편안히 거인의 팔에 기대어 잠을 청하고 있었다는 훈훈한 결말로 끝나지. 흠흠, 너무 감동적이지 않니? 흠흠, 그래서 젊은 부부들이 이 책을 아주 좋아한다고 하더군, 흠흠흠흠흠흠.”
말을 한꺼번에 많이 해서인지 그는 잔기침을 길게 했다. 잠시 말을 쉬는 사이 카할이 손을 번쩍 들었다. 실크롱이 허락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책 ‘키클로프스와 키키’에서 키클로프스는 양치기여서 치즈와 우유를 먹고살잖아요. 그래서 길을 잃은 키키에게 자신이 만든 치즈를 나누어주고요. 키키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어디선가 등장해 단숨에 그를 구해주지요. 아마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양을 치고 사는 거인이 그렇게 난폭하거나 잔인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흠흠, 이게 문제야. 흠흠, 아니지, 저들을 나무랄 수는 없지. 흠흠, 다 작가와 과대 마케팅으로 홍보한 출판사 잘못이니까. 흠흠, 잘 들어라. 흠흠, 그것은 아이들 구미에 맞게 쓴 동화란다, 허구라고. 흠흠, 만약 너희가 3,000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블랙수트마키아 전쟁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더라면, 흠흠, 당장 그 책들을 다 불질러 버렸을 게다. 흠흠, 내가 브라잇동맹사에 손을 얹고 장담하지.
그럼, 흠흠, 말 나온 김에 진짜 현실에서의 ‘키클로프스족(族)’을 자세히 알아볼까? 흠흠, 그들은 평소 양을 치고 야생식물과 양젖을 먹으며 살았다고 하지.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단다. 흠흠, 바로 그들이 사람고기에 맛을 들였다는 거야. 흠흠, 그래서 종종 인간들을 사냥했지. 흠흠, 그들은 동굴에서 살았는데 큰 돌로 입구를 막아 사냥한 인간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가뒀어. 흠흠, 그리고 배가 고프면 한 명씩 바위에다 집어던져 두개골을 깨뜨리고 뇌수를 터트린 후 팔다리를 쭉쭉 찢어먹었단다. 흠흠, 내장, 살점, 골수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후루룩 들이켰지. 흠흠, 어떻게 이런 괴물이 작은 아이와 나란히 앉아 오손도손 치즈를 나눠먹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니? 흠흠, 그에겐 그저 한입거리도 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실크롱은 마치 자신이 그 거인이라도 된 것처럼 갈기갈기 손으로 찢는 시늉과 후루룩 삼키는 소리를 일부러 요란스레 냈다.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숨을 할딱거렸다. 카할의 긍정적인 표정도 두려움으로 물들어졌다. 실크롱은 앞에 앉은 순진한 이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조롱으로 찌그러진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웬일인지 버릇처럼 내던 흠흠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다음 문장을 매끄럽게 뱉어냈다.
“요툰하임, 그곳은 블랙수트마키아 이전부터 거인들이 살던 곳이지. 마법양탄자도 가기를 거부한다는 그곳은 가본 자가 매우 드물어서 아직도 그 위치는 잘 모른단다.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요툰하임의 우거진 숲은 매우 원시적이고 불가사의하여 어두운 마법이나 이상현상이 자주 출몰한다고 하지. 하지만 불운하게도 거인들은 다크 동맹의 주군인 블랙수트와 함께 전쟁에서 거의 전멸을 당했어. 흠흠, 그러니 요툰하임에서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만 셈이지. 흠흠흠흠...”
그는 잔기침과 심호흡을 여러 번 한 후 다시 열정적으로 주장을 이어갔다.
“흠흠, 아주 오래전에, 블랙수트마키아 이전에 우리 딥언더니아 선조들은 침략한 거인들에 맞서 용맹하게 싸운 전력이 있단다. 흠흠, 처음에 그들은 선조들의 작은 체구를 비웃으며 놀려댔지만 곧 그 놀림은 싸늘한 죽음의 비명으로 변하였지.
흠흠, 중요한 것은 체구가 아니야. 흠흠, 누가 더 끈질기고 지독하냐이지. 흠흠, 너희는 항상 선조들의 용기와 용맹을 기억하고 배워야만 할 것이야. 알겠니?”
수염을 곱게 쓰다듬으며 그가 딥언더니아인인 카할과 우란을 넌지시 쳐다보자 그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거인이 다 나쁜 건 아니잖아요? 제가 알기로는 선한 ‘과보족(族)’도 있잖아요?”
이안의 물음에 실크롱의 눈이 홀연 반짝거렸다. 질문을 한 그가 매우 기특하다는 눈빛이었다.
“그렇지. 흠흠, 과보들은 심성적으로 악하지 않지. 흠흠, 그들은 전쟁에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선언했단다. 흠흠, 그랬기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거인 부족이 될 수 있었어. 흠흠, 원래 그들은 요툰하임 주변에 조용히 살았었는데 전쟁이 일어나기 전, 깊은 숲속으로 숨어 들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전해진단다. 흠흠, 현재까지 그들의 행방은 전혀 모르고 있지.
흠흠, 그러나 만약 안다고 해도 누가 그들과 같이 있고 싶어 하겠니? 그것을 손목과 귀에 칭칭 둘렀다는데 말이야.”
그의 손이 약간 옆으로 비껴 나 분필을 흔들자 칠판 양쪽을 가른 수직선 한가운데에 ‘과보족’이라고 써졌다. 그때, 침묵을 지키며 열정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한 수진이 ‘전혀 모르겠소’란 표정으로 질문했다.
“뭘 두르고 있다는 건가요?”
구석에 앉은 허준이 잔뜩 무시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누런 뱀이지 뭐야, 바보야!”
“뭐, 바보라고?”
“그런 쉬운 것도 모르니 바보지. 그럼 뭐야?”
수진은 순간 발끈했다. 그녀가 뭐라고 쏘아붙이려는 순간, 뒤에 앉은 이안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쿡 찔렀다. 그녀가 뒤돌아보자 그만하라고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분을 참았다. 롤리마을에서는 이렇지 않았었는데 어째 갈수록 점점 다혈질로 변해가는 것 같다고 그녀는 느꼈다.
실크롱은 희망에 가득 찬 눈으로 카할과 우란을 넌지시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흠흠, 너희가 알고 있는 다른 다크 동맹원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보겠니?”
아쉽게도 그들은 거인족 외에 다른 동맹원은 알지 못하였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은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파사’와 ‘구영’이 있지요.”
“흠흠, 오호 왕허준, 의외인 걸? 흠흠,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나?”
실크롱의 잔뜩 기대에 찬 눈빛은 그의 다음 대답으로 금세 시들해졌다.
“더 이상은 모르는데요.”
“그래그래. 흠흠, 휴우, 이름이라도 아는 것이 어디냐?
흠흠, ‘파사’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파란색 구렁이로 호숫가에 산다고 알려져 있지. 흠흠, 그러나 꼭 물가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땅 위도 잘 기어 다녔단다. 흠흠, 그 덩치가 얼마나 큰지 코끼리를 산채로 잡아먹었다고 하지? 흠흠, 코끼리를 먹으면 3달 동안 천천히 소화시킨 다음 뼈를 내뱉었다고 하지? 흠흠,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흠흠, 화가 나면 호수나 강 근처 마을을 초토화시킬 정도로 사악하고 공격적인 괴물이었단다.
흠흠, 그럼 블랙수트마키아 에서 '파사'를 공격한 브라잇 동맹원에 대해 카할이 한번 말해볼까?”
“글쎄요. 딥언더니아 군사들은 아닐 것 같고, 누구였을까요?”
그의 답변에 실크롱이 매우 실망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은 고개를 숙여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브라잇동맹사를 독파한 이안은 예외였지만. 그가 손을 번쩍 들어 대답했다.
“아쿠아니아 왕국의 인어 전사들이 마왕성의 해자 속에서 그것을 공격해 죽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 그렇지. 흠흠, 거기 해마, 흠흠, 넌 아쿠아니아 태생인데 전혀 알지 못했나?”
“‘파사’라는 이름도 여기 와서 처음 들었습니다. 참 신기하네요.”
실크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실망감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냈다. 자국의 카할과 우란이 이럴 때 대답도 좀 잘하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자, 당장 내일이라도 딥언더니아의 교육부 장관에게 탄원서를 보내야겠다고 결심을 마친 후였다. 그는 더 이상 아이들에게서 답변 듣기를 단념한 채 혼자 설명을 이어갔다.
“흠흠, ‘구영’은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괴물인데 각각 사람의 머리를 닮았고 몸은 침팬지를 닮았단다. 흠흠, 물과 불을 입과 코에서 뿜어내어 사람들을 괴롭혔다고 전해지지.”
그가 쇠분필로 허공에다 쓰자 거인들 이름 아래로 ‘파사’와 ‘구영’이 적혔다. 흠흠거리며 기침을 내뱉은 후 그의 실눈이 지그시 칠판을 향한 채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뭔가 기억해내려는데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키메라’가 빠졌어요.”
실크롱이 두리번거리며 방금 누가 말했나 찾았는데 놀랍게도 티앤 단까오였다. 그는 평소에도 활달했지만 특히 이 시간에는 굉장히 열정적인 태도로 임하는 듯했다. 실크롱이 ‘키메라’를 밑에 적어 넣으며 보충설명을 이어갔다.
“흠흠, '키메라'는 불을 뿜는 괴물로서 사자와 염소의 머리가 달렸고 용의 몸과 날개를 갖고 있지. 흠흠, 근데 여기 목록에 뭔가 더 빠진 것 같은데 말이야. 그게 뭘까?”
“‘미노타우르스’와 ‘백골단’이 남았어요.”
“흠흠, 티앤 단까오가 이 방면에 관심이 많구나. 흠흠, 아주 좋아. 흠흠.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렴.”
그는 미노타우로스와 백골단을 키메라의 아랫줄에 맞춰 마저 적어 넣었다.
“흠흠, 거기 조용한 수진 양, 알고 있는 게 있으면 한번 말해볼지 않으렴?”
수진의 눈이 밤송이처럼 휘둥그레졌다. 브라잇 동맹을 알게 된지도 겨우 두어 달밖에 안된 그녀에게 3,000년 전의 괴물들에 대해 말해보라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요구였다. 더군다나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외눈박이 거인이라는 둥, 커다란 구렁이가 코끼리를 먹었다는 둥, 얼굴이 아홉 개 달린 괴물이라는 둥 도대체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아한 혼란 상태였다. 무슨 그리스로마신화 수업도 아닌데 말이다.
그녀는 눈만 껌뻑껌뻑하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눈치 빠른 이안이 대신 대답했다.
“‘미노타우르스’는 허리 위는 인간이고 아래는 황소인 괴물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생명체를 머리에 난 큰 뿔로 들이받아 바로 먹어치우지요. 주로 사람을 사냥합니다. 블랙수트마키아 에서 총 10마리의 미노타우르스가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백골단’은 원래는 인간이었지만 마왕이 건네준 비약을 먹고 온몸이 백골로 변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먹고 자지 않아도 죽지 않는 영생을 얻었고 고통조차 못 느끼게 되었지요. 본심이 사악한 자들이기에 백골로 변한 후에도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머나, 그럼 우리가 한밤중에 본 것이 그들이었던 거야?”
조용히 듣고만 있던 수진이 벌떡 일어나 뒤돌아서 그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그날의 강렬한 두려움과 공포가 생생히 실려 있었다.
“흠흠, 그들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냐?”
실크롱이 실눈을 힘껏 뜨며 묻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였다. 그녀가 확신하는 어조로 외쳤다.
“백골단이요. 얼마 전에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교실 안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며 불편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실크롱이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배를 움켜잡고는 깔깔거리며 크게 웃기 시작했다. 이안을 제외한 다른 이들도 마음껏 따라 웃었다. 눈에 맺힌 눈물을 수염으로 닦으며 그가 겨우 진정시킨 목소리로 그녀를 나무랐다.
“흠흠, 아직 잠에서 덜 깬 것 같구나. 흠흠, 잠꼬대하는 것을 보니.”
“잠꼬대가 아니에요. 저랑 이안이랑 한밤중에 오두막에 숨어서 직접 목격했단 말이에요. 그들은 검은색 망토를 둘렀고 말을 타고 숲으로 사라졌어요. 그들의 눈에서 붉은 광선이 튀어나오고, 춥지 않은 날씨인데도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났어요. 망토 아래 유일하게 드러난 손은 바로 백골이었어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그렇지 이안?”
실크롱과 아이들의 고개가 이번엔 그에게로 향하였다. 그는 무척 당황하여 눈을 크게 치켜뜨고는 뭔가를 결심한 듯,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손사래를 치며 둘러댔다.
“하하하, 얘가 아직 잠이 덜 깼나 봐요. 꿈에서 본 것을 현실이라고 믿다니. 야, 잠꼬대 좀 그만해. 곧 정오라고.”
그의 이런 반응은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같이 봐놓고서 이제 와서 발뺌하다니. 화가 난 그녀는 변명하려 입을 열려다가 그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의 강렬한 파란 눈동자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돼.’
그녀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겨우 입을 다물었다. 실크롱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부드럽게 달랬다.
“흠흠, 꿈을 생생하게 꾸면 가끔 현실과 착각할 때도 있지. 흠흠, 수진아, 너만 그런 게 아니란다. 흠흠, 10살이던 내 아들도 어느 날 아침, 자신이 동굴에서 키클로프스를 만났다고 주장했었지. 흠흠, 그날 밤 아들이 잠자면서 키클로프스 이름 부르는 것을 듣고 얼마나 웃기던지. 흠흠, 하하하.”
분위기가 다소 진정되자 그의 손목이 허공에서 옆으로 쓱 미끄러졌다. 동시에 칠판에 쓰인 ‘다크 동맹’ 글자 아래로 강조하는 두 밑줄이 짝짝 그어졌다.
“흠흠, 보다시피 다크 동맹에는 거인들과 파사와 구영, 키메라, 미노타우르스와 백골단, 그리고 흠흠, 아하, 불을 내뿜는 블랙 드래곤이 속해있었지. 흠흠, 이들의 우두머리는 당연히 마왕 블랙수트 이고.”
그는 ‘다크 동맹’ 글자 위에다 ‘마왕 블랙수트’를 크게 적어 넣었다. 그리고 오른쪽 책상 위로 폴짝 건너가 분필을 다시 흔드니, ‘브라잇 동맹’ 제목 밑으로 똑같이 가로 밑줄이 그어지고, 그 아래로 ‘일룸니아, 오나시아, 딥언더니아, 스위티니아, 아쿠아니아’가 나란히 적혀 내려갔다.
오나시아와 딥언더니아 사이에는 일부러 몇 줄 공간을 비어두었다.
“흠흠, 이제 ‘브라잇 동맹’에 대해 이야기나 해볼까? 흠흠, 마왕에 대항하여 일룸니아 왕국의 ‘이안 1세’가 브라잇 동맹을 이끌었지.”
그는 ‘블랙수트’와 대등한 줄에 ‘이안 1세’를 더 크게 적어 넣었다. 그리고 더 이상 아이들에게 묻지 않은 채 ‘오나시아’ 밑의 빈 줄에다 ‘치우 장군, 그의 81명 형제들’을 써넣었다. 왕허준은 드디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주제가 나왔다면서 시무룩하던 얼굴이 활짝 펴지었다.
“흠흠, 당시 ‘오나시아 왕국’의 ‘염제 신농’왕을 대신하여 파견된 치우 장군과 그의 용감한 형제들은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는 데 큰 공헌을 세웠단다. 흠흠, 어디, 오나시아의 왕자께서 보충설명을 해주겠나?”
“치우 장군과 그의 81명 형제들은 쇠를 다루는 데 신통방통한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 집단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흠흠, 맞다. 흠흠, 사실 그들은, 흠흠, 한때 딥언더니아를 방문해 대장장이 일을 배운 적이 있지.”
“와, 그게 정말인가요?”
카할은 처음 듣는 사실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조국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물씬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 방면에 지식이 있던 이안조차 그런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에 꽤나 놀라는 눈치였다.
“그럼 그들의 신통방통한 기술은 다 이곳에서 나온 것이었군요.”
이안의 꼭 집은 얄미운 언급에 허준의 표정이 험악스레 일그러졌다. 자국의 기술이 뭐, 저 조그맣고 무식한 난쟁이 딥언더니아인에게서 전수받은 거라고?
기분이 확 상한 그를 향해 실크롱의 작은 눈이 살살 눈웃음을 쳤다. 왕자의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시선을 거두어 실크롱은 칠판을 쳐다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흠으음. 조사에 따르면 그들은 딥언더니아에서 여러 해 일을 배웠고 일이 끝나자 바로 오나시아로 건너갔단다. 흠흠. 게다가 원체 타고난 재능도 있었는지 곧 오나시아 뿐 아니라 다른 동맹국에서도 쇠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대장장이로 유명해졌지. 흠흠흠, 블랙수트마키아 전쟁준비를 위해 그들이 제작한 무기와 방패는 딥언더니아에서 만든 것과 거의 대등할 정도로 우수한 품질이었다고 알려져 있단다.”
“또한 그 대장장이 집단은 강인한 성품과 용맹함으로 유명하지요.”
“흠흠, 맞다, 이안. 흠흠, 그들은 아주 용감했어. 흠흠, 특히 치우 장군의 싸움 능력은 다른 형제들을 뛰어넘을 정도로 타고났었지. 흠흠, 그는 전사 그 자체였다. 흠흠, 그와 형제들의 독특한 외모나 식생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나, 허준?”
“그들은 구리로 된 사각형 머리에 철로 된 이마를 하고, 모래와 돌을 밥으로 먹었답니다.”
마음의 평정을 겨우 되찾은 그가 자랑스레 대답하자 다른 이들은 신기해하며 휘파람을 불거나 “와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중 가장 뜨겁게 반응한 이는 수진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모래와 돌로 만든 떡을 열심히 씹고 있는 구리 로봇이 떠올랐다. 생각하면 할수록 재미있는지 그녀의 입이 옆으로 길게 찢어지며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그때 혼자 구석에 떨어져 앉았던 티앤 단까오가 손뼉을 딱 치더니 공포에 휩싸인 목소리로 왕허준을 향해 반박을 가했다.
“어떻게 그런 걸 먹고살 수가 있지? 순전히 거짓말 아니야? 케이크도 없이, 초콜릿이나 사탕도 없이 무슨 재미로 산단 말이야?”
오나시아 왕자는 자신을 왜 또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무섭게 쏘아붙였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직접 찾아가서 물어봐.”
“그는 이미 죽었잖아. 죽은 자를 어떻게 찾아내? 지하세계로 내려가서?”
“난들 어떻게 알아? 자꾸 귀찮게 하지 말란 말이야! 이씨~”
그의 짜증 섞인 볼멘소리에 티앤 단까오도 기분이 팍 상한 듯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교실 안에 순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눈을 감은 채 골몰하던 실크롱의 두 눈이 번쩍 뜨이더니 손뼉을 쳐서 이 불편한 침묵을 깨뜨렸다.
“흠흠, ‘치우 장군’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혹시 들어봤니? 흠흠, 그가 전쟁에 참전하기 전 대장장이였을 때 말이다. 흠흠, 그가 유일하게 만든 악기가 하나 있다던데. 흠흠. 그게 뭐더라? (그는 답을 찾기 위해 실눈을 감고 온 정신을 집중했다. 40초 후, 몸을 부르르 떨더니 눈이 다시 떠졌다.) 흠흠, 맞다.
청동 징을 만들었다는데, 흠흠, 전설에 따르면 그 징을 치면 오래전에 고대 오나시아에서 숨겨둔 ‘1백만 병마대군단’을 소환할 수 있다는구나. 흠흠, 그러나 블랙수트마키아에선 그것이 전혀 등장하지 않았지. 흠흠, 물론 전설이 진짜인지 허구인지 확실치도 않지만 말이야. 흠흠, 혹시 허준은 관련해서 뭐 들은 거 없나?”
그러나 허준은 아직껏 분이 다 풀리지 않은 듯이 씩씩거리는 얼굴을 옆으로 홱 돌려버렸다. 한 번만 더 건드리면 캠프고 뭐고 당장 교실을 뛰쳐나갈 기색이었다.
실크롱은 아이들에게 등을 돌린 채 책상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칠판에 적힌 브라잇 동맹국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문득 답답함을 느꼈는지 그가 수염을 손가락으로 마구 휘저으며 잡아당기었다. 긴 수염실의 움직임이 마치 물결처럼 요동쳐서 계속 바라보면 멀미가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그의 온몸을 약하게 흔들며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10분이 흐르고 그의 모든 동작이 불현듯 딱 멈추었다. 놀란 아이들도 따라 숨을 멈추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그가 수염을 박박 잡아당기며 빽빽거렸다.
“흠흠, 분명 여기에 뭔가가 빠져있는데. 흠흠, 도대체 뭐지, 뭐냐고!”
“드래곤이 빠졌잖아요. ‘블랙 드래곤’에 대등하는 ‘화이트 드래곤’이요.”
이안이 칠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답하자 그의 찌푸렸던 이마가 곧장 펴지며 “아하~” 외쳤다. 순간 그의 입에서 누런 가래가 튀어나와 오나시아 왕자인 허준의 이마 위로 툭 떨어졌다. 그는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폭발하더니 벌떡 일어나 교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그러나 실크롱과 아이들은 그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흠흠, 어떻게 이렇게 기억이 안 날 수가 있지? 흠흠..”
그는 ‘브라잇 동맹’란의 제일 아래로 ‘화이트 드래곤’을 적은 후 바로 그 밑에 ‘왕관 독수리’를 연이어 적었다.
“흠흠흠, ‘화이트 드래곤’은 ‘블랙 드래곤’처럼 불을 쏘진 못하지만 구름과 안개를 옷처럼 두르고 다니기에 흠흠, 불길이 잘 침투하지 못하지. 흠흠흠, ‘왕관 독수리’는 아주 거대해서 하늘에서 날갯짓을 하면 흠흠흠, 지상에 큰 바람을 일으켰단다. 흠, 그들은 이안 1세의 마법력이 불러들인 신성한 존재들로 흠흠흠, 브라잇 동맹을 위해 기꺼이 싸워주었지. 흠흠, 물론 전쟁이 끝난 후 바로 떠나가 버렸지만 말이야. 흠흐으음.”
그의 기침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이제 강의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는 몇 초간 수염으로 목을 따듯하게 문지르며 말을 아끼다가 다음과 같은 연설로 시간을 마무리했다.
“흠흠, 블랙수트마키아는 우리가 알아본 것처럼 결코 수월하거나 쉬운 전쟁은 아니었다. 흠흠흠, 약 3,000년 전 우리 조상들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많은 희생과 시련을 감당해야만 했었지. 흠흠, 그들은 바람 앞의 등잔불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 절대로 악에 굴복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단다. 흠흠, 오히려 이안1세의 탁월한 지도 아래 동맹은 하나로 뭉쳤고 더 좋은,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지.
흠흠,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말이다. 흠흠, 수만 년의 마력을 가졌다고 전해진 마왕의 힘이 예상보다 약했던 것도 사실이란다. 흠흠흠, 결국 승리의 깃발은 ‘하하호호히히’의 밝은 이곳으로 향했지. 흠흠, 그리고 마왕은 지하에 영원히 봉인되어 다시 이 땅 위에 전쟁이 일어나진 않을 테지.
흠흠흠, 아참, 갑자기 떠올랐는데 말이다. 흠흠흠, 왜 전에 내가 얘기했던 괴짜 왕실서기관이 엮었다는 비사 카더라통신 말이다. 흠흠, 거기에서 사라졌다고 믿은 다크 동맹이 약 300년 전에 홀연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하더구나. 흠흠, 동맹 내에서가 아니고 평범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라던데. 흠흠, 중국이던가? 맞다, 중국이다. 흠흠, 아이고, 근데 지명은 도저히 생각이 안 나네 흠흠, 모르겠구나.
흠흠, 앞으로 우리 브라잇 동맹은 더욱 교류하며 발전해나가야 한단다. 흠흠. 이 캠프가 정말 오랜만에 다시 열리어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처럼 말이야. 흠흠, 브라잇 동맹, 그것을 지키고 수호해나가는 길이 우리의 찬란한 미래가 될 것이다. 흠흠, 브라잇 동맹이여, 영원하라! 딥언더니아 만세!”
그의 얼굴에는 흡사 국위선양 기도를 마친 수도승처럼 경건함과 엄숙함이 깃들여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자신의 말에 스스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릴 것 같던 그가 겨우 감정을 추스르더니 교실을 후다닥 뛰쳐나갔다.
점심시간이 돌아왔다는 기쁨이 아이들을 붙잡고 있는 가운데, 딱 한 사람, 이안은 예외였다. 그는 어두운 표정이 되어 앞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수진을 불러 세웠다.
“잠깐만.”
그러나 그녀는 모른 척했다. 그녀가 우란과 같이 나가려 하자 그는 재빨리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오늘 너랑 할 말 없으니까 저리 가시지.”
그의 손목을 매몰차게 털어내며 그녀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아직도 그에게 화가 난 상태였던 것이다. 그가 옆으로 지나치며 그녀에게 몰래 귓속말을 전했다.
“내 방으로 급히 와줄래. 보여줄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