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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Hwang 황선연 Oct 10. 2017

9. 샌드펜으로 보낸 편지

9. 샌드펜으로 보낸 편지


 푸다크 별궁의 중앙홀로 돌아온 수진은 바로 이안의 방을 찾아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차갑고 쌀쌀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오랫동안 쓰지 않은 방처럼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잘 정돈되어 있었다. 침대를 포함하여 어디 하나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그녀는 난장판이 된 자신의 방을 떠올리며 살짝 부끄러웠다.


 그녀가 소파에 걸터앉는 동안 그는 책상 서랍에서 낡고 오래된 수첩 하나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미 앞의 여러 장은 뜯겨나갔고 종이는 누렇게 변색된 상태였다. 그녀가 수차례 그것을 뒤져보았지만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또다시 화가 난 그녀는 수첩을 세게 흔들며 그에게 불평을 쏘아댔다.


“이게 뭐야? 아무것도 적힌 게 없잖아. 계속 나 놀리는 거야?”


“아, 깜빡했어.”


 그는 수첩을 빼앗아 뒤로 몇 장 넘기더니 빈 페이지의 왼쪽 가장자리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녀에게 다시 들이밀었다.


“엄지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여기, 내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 찍어.”


“더럽게 꼭 그렇게 해야 해?”


“그래야 나한테 온 샌드펜으로 쓰인 편지를 네가 읽을 수 있단 말이야.”


 그녀는 엄지손가락 지문 부분에 침을 바른 후 도장 찍듯이 꾹 눌렀다. 침이 종이에 스며들자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빈종이 위로 검은 글씨들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그 과정을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히든벅이 이안에게 보낸 답장이었다. 사슴이 어떻게 편지를 썼는지에 관해 우리로선 알 길이 없지만 각자의 상상에 맡기고자 한다.


 그녀는 다 읽고 난 후에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여러 번 더 읽어야 했다. 그리고 보충설명을 원하는 시선으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아까 교실에서 하던 이야기가 맞은 거잖아. 그들은 백골단이었어. 근데 아까 왜 그렇게 한 거야? 뭐, 아직 잠이 덜 깨었다고? 내가 얼마나 무안했는지 알기나 해?”


“아까는 정말 미안해. 근데 그럴 수밖에 없었어. 아직 아무도 마왕 블랙수트가 탈출한 사실을 모르니까. 한번 떠올려봐! 네가 백골단을 목격했다 하니까 그들이 보인 반응들을. 다들 네가 농담이나 잠꼬대하는 줄로 여겼잖아. 당분간 이 사실은 우리만 아는 비밀로 붙여야 해.”


 그녀의 시선이 여전히 수첩에 집중된 채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기 적혀있듯이 마왕이 탈출했다고, 마왕이? 내가 오늘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는 지하얼음에 영원히 봉인되어있는 것 아니야? 근데 어떻게 탈출했다는 거지? 히든벅이 괜히 농담한 것 아닐까?”


“아닐 거야. 무미건조한 그가 절대 샌드펜으로 그런 농담을 적어 보냈을 리 없어. 정확이 어떤 증거를 갖고 있는지 편지에서 알 순 없지만 분명 뭔가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블랙수트마키아 이후 사라졌던 백골단을 오두막에서 우리가 직접 목격했던 것도 그렇고.

 생각해봐! 그들이 한밤중에 그렇게 급히 이동한 이유가 탈출한 마왕과 연관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떠올려봐! 예전 키릴장막으로 향했을 때 이전에 없던 낭떠러지가 생겨났었지? 왜, 기억 안 나? 대나무 바구니를 타고 건넜던 곳 말이야. 내가 짐작하건대 그의 탈출로 인해 발생한 지진으로 그곳 지형이 바뀐 거 같아.”


“그렇지만 여기 편지에선 그 외에 별일이 안 생겼다잖아. 마왕성에 불이 계속 꺼져있다고 하고. 아마 전쟁에서 진 끔찍한 기억 때문에 ‘하하호호히히’에서 그가 영원히 도망쳤을 수도 있지 않겠어?”


 그녀의 말에 그는 책상 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시 눈을 뜨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아냐, 그렇지 않을 거야. 그는 분명 다시 돌아올 거야. 복수를 위해 여기 브라잇 동맹에 꼭 돌아올 거야.”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거 아니니?”


 그녀의 물음에 이안이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안을 서성이었다. 그리고 걸음을 멈칫하더니 두 주먹을 쥐고 확신에 찬 어조로 그녀를 항해 물었다.  


“대답해봐. 3,000년 전 마왕 블랙수트가 누구한테 져서 여태까지 봉인되어 있었던 거지?”


“브라잇 동맹한테 진 거라며?”


“맞아. 더 정확하게는 동맹을 대표하는 일룸니아의 ‘이안 1세’와 겨루다 진 거지. 둘은 당시 악과 선을 대표하는 존재들이었으니까. 사실 동맹국들은 전쟁에서 이긴 후 마왕을 죽이자는 의견을 내놨다고 해. 하지만 이안 1세의 심한 반대로 실행될 수 없었지. 결국 그의 제안에 따라 마왕을 지하의 얼음 속에 산 채로 봉인해버린 거야. 살아있는 채로 말이야. 너무 끔찍하지 않니? 근데 그가 그것을 깨고 드디어 밖으로 나왔어. 만약 네가 그라면 누가 제일 먼저 떠오르겠어?”


“당연히 이안 1세이지. 그 때문에 긴 시간 동안 그렇게 갇혀 있었던 거니까.”


“맞아. 이안 1세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아직까지 그의 피를 잇는 일룸니아 왕가가 있어. 그러니 제일 먼저 누구한테 복수하려 들겠어? 당연히 일룸니아의 왕이지. 난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지금 왕좌에 앉아있는 제임스를 해치려 들 거야. 근데 아직까지 별 소식 없이 조용하잖아?”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야! 마왕은 그냥 떠난 거라고. 아마 앞으로도 안 나타날 거야. 다시 봉인될까 봐 무서워서 복수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할 거라고.”


“수진, 넌 상황을 참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좋은 의미야, 나쁜 의미야?”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본래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둘 다야. 히든벅이 여기에 쓴 것처럼 미리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지만 수진, 난 계속해서 불길한 예감이 들어.”


“불길한.. 예감이라니?”


“브라잇 동맹과 다크 동맹의...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 같아.”


 ‘전쟁’이란 단어에 그녀의 몸은 바짝 얼어붙었다. 인터넷이나 뉴스에서 보던 그런 전쟁을 말하는 건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광란과 폭력이 당연시되는, 매우 비정상적이고 이성이 결핍된 그런 전쟁 말이다. 그 끔찍한 악몽이 아름다운 이곳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그녀의 머릿속으로 별별 복잡한 생각들이 마구 부어지기 시작했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그 위로 쓰러지더니 이내 두 손안에 얼굴을 파묻고 체념을 늘어놓았다.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몰라. 어차피 난 죽을 걸로 되어 있으니 이대로 조용히 있으면. 전쟁이 일어나면 제임스가 동맹군을 이끌고 전면전을 치르게 되겠지. 난.. 그냥 끝날 때까지 이렇게 숨어 지내면 되는 거야.”


그의 말에 그녀는 깜짝 놀라 반색을 표했다.


“그냥 숨어있겠다고? 넌 브라잇 동맹이 지든 이기든 상관없단 얘기야?”


“...........”


“여기 딥언더니아 왕국이 처참히 멸망당하더라도 모른 척할 거냐고? 너의 일룸니아 왕국은 또 어떻고?”


 그녀의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아무 말도, 아무 반응도 내놓지 않았다. 잠시 후 손이 내려지자 그의 얼굴에는 세상의 온갖 고민을 짊어진 고행자의 늙어버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흐느끼었다. 수진은 처음 보는 그의 절망한 모습에 어쩔 줄 몰랐다.


“난... 아직 마왕에게 대적할만한 힘이 없어... 난 3,000년 전의 위대한 왕인 이안 1세가 아니라고. 아직 어리고... 내가 동맹을 이끈다면 마왕과의 전쟁에서 분명 지고 말 거야. 난 겁이 나.... 오히려 어른인 제임스가 전쟁에 더 맞을지도. 아마도 내가 뱀파이어로 변하고 죽은 걸로 숨어 지내는 비참한 상황에 빠진 것도 다 그런 신의 뜻일 수도.. 있지 않겠어?”      


"신의 뜻이라니,  그 따위 말이 어디 있어?"


 그녀의 눈썹 끝이 찍 올라가더니 리는 눈초리로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그의 약해진 모습에 그녀는 슬슬 화가 나려 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최악으로 예측하고, 일룸니아의 왕자로 태어나 자연스레 부여된 무거운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려고만 했다. 자신의 노력으로 상황을 바꾸려 하기보다 그저 타고난 운명이나 숙명으로 모든 걸 돌리려 했다. 직접 싸워보지도 않은 채 떠오르는 변명을 지껄이며 자꾸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그건 비겁한 행동이었다. 올바르지 않은, 씩씩하지 않은, 한마디로 수진의 마음에 참으로 안 드는 자세이고 태도였다. 항상 듬직하게 앞에서 이끌어주던 그에게 이런 약한 면이 있을 줄이야.


 그런데 한편 그녀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었다. 마왕 블랙수트가 그렇게나 두려운 존재인가? 아주 강력한가? 자신이 잘 알지 못해서 이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그녀는 침대로 다가가 그의 옆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그의 두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은 채 두 눈을 감았다. 그녀의 낭랑한 노래가 방 안에 그윽이 울려 퍼지었다.      




“알지도 못할 우리의 앞날

 결말이 좋을지 나쁠지 우리는 전혀 모르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중요할까?

 이 순간 우리가 함께 있는 데 말이지.


 두려운 미래여, 그대는 우리를 절대 파괴하지 못하리.

 무서운 예측이여, 그대는 우리를 끝내 삼키지 못하리.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갖고

 신은 절대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면

 창조한 세상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하려는 그의 뜻대로 다 이루어지리라.     


 지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떨며 서 있지만


 참고 견디며 희망을 꿈꾼다면

 어디선가 밝은 빛이 새어 들어와 우리를 인도할 거야.


 참고 견디며 희망을 꿈꾼다면

 누군가가 커다란 손을 내밀어 우리를 끄집어내 줄 거야.


 그리고 이런 말이 들릴 테지.


 담대해지라고. 용기를 가지라고. 자신은 결코 너희를 버린 적이 없다고.


 아,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마오.


 우린 그저 반짝이는 희망을 꿈꾼 잘못밖에 없다오.”     




 이것은 그녀의 엄마가 그녀가 어릴 적에 불러주었던, 그리고 외할머니가 어릴 적 엄마에게 들려주었었던 노래였다.


 노래가 끝난 후에도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눈도 어느새 감겨 있었다. 그들을 둥글게 감싸주는 잔잔한 램프의 불빛이 고요한 방패가 되어 ‘불안’이라는 파도에 휩쓸려버리려는 그들을 지켜주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서서히 평안과 위안이 솟아났다. 담대한 마음을 점차 회복해갔다.


 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접시들의 달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매우 명랑한 목소리로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점심시간이네. 우선은 잘 먹고 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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