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잎 아홉 장 따는 마음

엄마의 호박잎

by 재해석



계절의 보폭이 넓어지면 마당 구석구석에는 초록의 식탐이 차오릅니다. 울타리 너머로 고개 내민 넓적한 잎사귀만 보아도 가슴이 내려앉는 것은, 내 안에 유기되지 못한 기억의 부스러기 때문일 겁니다.


작년 봄, 이웃집 승희 씨가 던져둔 호박씨 몇 알이 기어이 평온을 침범했습니다.

어디로 뻗을지 모르는 호박 줄기의 눈먼 손이 고집스럽게 우리 집 울타리를 붙잡았습니다.

고추밭을 오갈 때마다 그 끈질긴 구애를 먼 방향으로 돌려놓곤 했지만, 눈치 없는 생명력은 기어이 내 마당 끝자락에 뻔뻔한 직인을 찍었습니다.

칡잎이라 믿고 싶었던 외면의 시간도 잠시, 햇살 아래 거친 질감은 부정할 수 없는 호박잎이었습니다.


잎을 마주할 때마다, 시간은 낡은 필름처럼 감겨 엄마와 걷던 그해 산책길로 나를 소환합니다.

병색 짙은 엄마가 남의 논두렁 탐스러운 호박잎 앞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엄마의 마른 손이 본능처럼 초록 잎 첫 장을 꺾어 올렸을 때, 공범이 되기 싫은 결벽증 환자처럼 암 투병 중인 엄마에게 핀잔을 줬습니다.

"잎을 좀 솎아줘야 호박이 실하게 열리는 법이야."

엄마의 나지막한 항변은, 딸의 어리석은 도덕심 앞에 힘없이 꺾였습니다.

그때 왜 그 하찮은 이파리 한 장보다 옳음이라는 허울이 중요했을까요.

엄마가 말렸어도 강제로 손에 쥐여줬어야 했던 이파리들이었기에 호박잎을 볼 때마다 목이 죄어 옵니다.

내년 봄엔 우리 밭에 호박을 넘치도록 심어주겠다 호언장담했지만, 죽음은 언제나 약속보다 발 빠릅니다.

엄마는 우리 밭 호박잎 한 번 못 따 보시고 생의 건너편으로 먼저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작년 여름 이웃집 호박잎 앞에서, 마른침 삼키며 뒤늦은 참회 아홉 장을 기어이 뜯었습니다.


찜통 속에서 뜨거운 수증기를 견뎌낸 잎사귀들은 비로소 날카로운 솜털을 죽이고 순한 낯빛을 띄었습니다.

접시 위에 겹겹이 쌓인 저 연한 잎사귀들은 엄마의 수의(壽衣)를 닮은 그리움입니다.


아홉 번의 후회를 씹어 삼키며, 오늘에서야 엄마가 건네려 했던 사랑의 농도를 이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