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특별함의 부작용

by 재해석

특별대우는 위험하다.
특히 결핍이 많은 아이라면 더 그렇다.

“너는 특별해”라는 신호를 받으면, 아이는 그 말을 오래 품고 산다.
문제는 다음이다.


세상은 그 선생님처럼 친절하지 않은데, 아이는 비슷한 대우를 기대한다.
내가 그랬다.

졸업식 날, 오선자 선생님이 선물을 주셨다.

“유경이랑 네게만 주는 거야.”


같은 반 유경은 전교 회장이었다.
누가 봐도 받아 마땅한 아이였다.
앞줄에 서도 어색하지 않고, 상을 받아도 의아하지 않은 아이.

유경의 특별함은 모두가 수긍하는 종류였다.
하지만 내 쪽은 아니었다.


졸업식 전날 밤에도 전깃줄에 맞아 얼굴에 붉은 줄이 선명했다.
한눈에도 상이나 선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유경과 나를 같은 줄에 세우고

“너희 둘만”이라고 하셨다.

그날, 내 인생에 위험 신호가 입력된 거다.
아, 나도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전날 밤 사정이 특별하기는 했다.

아빠가 졸업식에 입고 갈 옷을 사라며 넉넉한 돈을 줬다.
쇼핑이라곤 해본 적 없던 나는 아무 가게나 들어가 옷 한 벌을 샀다.
새 옷을 들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날 밤 아빠는 옷값만큼 때렸다.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졸업장을 못 받는 줄 알았다.
그게 사실일 리 없겠지만, 그날의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맞은 밤, 옷 사고 남은 돈을 들고 집을 나왔다.
다니던 중학교엔 강당이 없어서 학생회관에서 졸업식을 하기로 했다.

학생회관 근처 허름한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잤다.

남은 돈으로 지불한 밤이었다.

낯선 공기, 복도 소리, 눅눅한 이불, 제대로 잠들지 못한 몸.
웅크린 채 상처를 만지며 아침이 속히 오기만 기다렸다.


그 밤이 무섭기도 했지만,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이해 안 되는 것들 때문이었다.

왜 나는 졸업식 전날 밤을 여인숙에서 보내야 하는지, 왜 새 옷은 기쁨이 아니라 피멍과 한 패인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선생님은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채셨다.
억지 미소 위로 슬픔이 번졌다.
마치 내가 보낸 그 밤에 당신도 함께 계셨던 것처럼, 선생님은 울음을 참는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안아 주셨다.

“네가 쓴 반성문 간직할게. 네 말대로 사는지 지켜볼 거야.”


반성문은 그 자리에서 끝나지 않았다.
선생님 손에 들어간 반성문은 종이 한 장이 아니라 약속이 되었다.

누군가 내 말을 믿고 지켜보겠다 하는 일은, 어린 내게 상보다 더 큰 일이었다.


선생님이 주신 졸업 선물은 '노란 손수건'이었다.

그 책을 닳도록 읽었다.
책장이 해질 만큼 읽었고, 줄거리보다 기분을 외웠다.

언제고 실수를 뉘우치고 돌아가면, 노란 손수건처럼 받아줄 곳이 있다는 믿음.
선생님은 그 믿음을 주고 싶으셨던 거다.


그 뜻은 좋았다.
너무 좋았다.

문제는 그 뜻을 과하게 해석했다는 데 있었다.


그날 이후, 세상도 우리 선생님쯤은 되어야 한다고 믿게 됐다.
적어도 나를 함부로 대하진 말아야 하고,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한 번쯤은 들어줘야 하며, 오해가 생기면 대충 넘기지 말고 “이 아이에겐 사연이 있겠구나” 정도는 짚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말해, 기대치가 높아졌다.


나는 '노란 손수건'을 받은 아이였다.
그것도 유경이랑 나, 둘만.
전교 회장과 나.


이 조합은 어린 자존감에 위험한 영양제와 같았다.

유경만큼 반듯하다는 뜻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선생님 눈에는 유경 옆에 세워 둘 만한 존재라는 뜻 아닌가.

그 해석은 이후 인생 곳곳에서 과장되게 부풀었다.


누가 나를 오해하면 유난히 분했다.
부당한 일을 겪으면 속이 뒤집혔다.
무시당하면 단순히 기분이 나쁜 정도가 아니라, 세계관이 흔들렸다.

아니, 나를 이렇게 대한다고?
나, 노란 손수건 받은 사람인데?


물론 세상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알 생각도 없었다.
삶은 선생님보다 무심했다.

선생님은 내 얼굴의 붉은 줄을 읽어냈지만,
사회는 “그래서요?” 하고 지나갔다.


속으로 계속 놀랐다.

왜들 이렇게 성의 없이 대하지?
왜 억울함을 설명하기도 전에 판결부터 내리지?

참으로 오만한 기대다.

그 오만은 허영에서 생긴 게 아니었다.
제대로 존중받아본 아이에게 생기는 후유증에 가까웠다.


한 번 특별하게 대해준 사람이 있으면, 평범한 취급이 모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게 바로 특별함의 부작용이다.


선생님은 상처 난 아이에게 책 한 권을 쥐여 주셨을 뿐인데, 나는 그걸 VIP 멤버십 같은 걸로 해석해 버렸다.

세상 어디를 가든, 누군가는 내 사정을 먼저 알아채고, 내 잘못 뒤에 있는 사연도 헤아려 주고, 적어도 유경 옆에 세워 둘 만한 대우쯤은 해줄 거라 믿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출입구부터 달랐다.

세상은 번호표를 뽑으라고 했고,
줄을 서라고 했고, 억울해도 불릴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아무도 내 얼굴의 오래된 붉은 줄을 기억하지 않았고, 아무도 내가 어느 졸업식 날 어떤 책을 받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필요 이상으로 발끈했다.

남들보다 유난히 서운했고,
남들보다 오래 토라졌고,
남들보다 집요하게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다.


생각해 보면, 부당함에 대한 민감성이라기보다

‘내가 이런 취급을 받을 리 없다’는 자의식이 컸던 것 같다.


어떤 사랑은 사람을 회복시키고,
어떤 사랑은 회복의 반동으로 기대치를 높인다.

나는 높아진 기대치 덕분에 자주 상처받았고, 기대치 덕분에 함부로 살지 못했다.


누군가 내게 무례하면 유난히 아팠지만, 동시에 나 역시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기준도 높아졌다.


내가 특별대우를 원했던 만큼, 누군가에게 나도 노란 손수건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부채감이 생겼다.

그래서 딸아이 초등학교 도서실에 노란 손수건 10권을 기증했는지도 모른다.


그 책은 오래전 이사 다니는 동안 잃어버렸지만, 선생님이 내게 심어 놓은 이상한 후유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권이 아니라 열 권을 보낸 까닭도, 좋은 뜻은 널리 퍼질수록 좋다는 고상한 이유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 특별함을 분산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나만 특별한 아이로 남아 있으면 피곤하니까.

다 같이 노란 손수건을 받는다면, 혼자만 유난 떨 일은 줄어들 거다.


선물은 내 삶을 두 방향으로 밀었다.

하나는 나를 살린 방향이다.
돌아가도 되는 아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아이, 실수보다 먼저 사람으로 봐도 되는 존재라는 믿음이다.


다른 하나는 예민한 방향이었다.
특별한 존재일 수 있다는 기대, 그러니 함부로 다뤄지면 안 된다는 과도한 자의식, 세상이 내 속사정을 조금쯤은 알아서 헤아려 줘야 한다는 순진한 오만까지 갖게 했다.


그러니 노란 손수건은 내게 위로였고, 동시에 부작용 설명서가 빠진 처방전이었다.


부작용 증세는 이렇다.

부당함에 과민해짐.
오해에 민감해짐.
평범한 취급을 부당 대우로 오인할 수 있음.
전교 회장과 같은 급으로 착각할 수 있음.


부작용이 있다고 약효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여전히 그 선물은 귀하다.


그 책 한 권 때문에 자주 서운했고, 자주 발끈했고, 자주 실망했다 해도, 그 책 한 권 덕분에 적어도 나만큼은 나를 아무렇게나 취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선생님은 내게 특별대우를 해주셨다.
그 덕에 특별대우를 요구하며 살았다.
유난스럽고, 피곤한 삶이었다.


그래도 괜찮다.

한 번쯤 그런 오해는 해도 된다.
세상이 자기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자신은 아무렇게나 버려질 존재가 아니라고, 조금 과장되게 믿어보는 시절이 있어도 된다.

나에겐 그게 노란 손수건이었다.


선생님은 졸업식 날 책 한 권을 건네셨다.
나는 그 책으로 위로를 배웠고,
조금 늦게는 오만을 배웠고,
한참 지나서는 그 오만조차 자존감의 서툰 초안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제목을 굳이 ‘특별함의 부작용’으로 정했다.


하지만 이상하다.
그 부작용을 완치하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