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게 질 생각은 없다
요즘 내가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입맛이 없어. 맛있는 게 없어.
- 피곤해 미치겠고 일어나는 순간부터 졸려.
- 뭔가 재밌는 거 없나? 하, 떠나고 싶다.
-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이대로 괜찮은 걸까?
7말 8초가 전국 공식 팔도 유랑 시기라면 6말 7초는 공식적인 혼돈의 시기인 걸까. 누구 하나 긍정의 기운을 내뿜지 않는다. 뭔가 처지는 기분이고, 딱히 즐거운 것도 없다. 그렇다고 가슴에 무언가가 응어리져서 뒤집어질 정도는 아닌데, 기운이 잘 안 난다. 입맛 없다더니 막상 밥 먹으면 아주 잘 먹는다. 잠이 잘 안 온다고는 하지만 머리 대고 눈을 깜빡이면 어느새 해가 떠 있다. 때려치우고 싶다더니 눈앞에 주어진 업무를 또 어찌어찌 해결하고 있다. 무서우리만치 하루하루가 똑같은데 시간은 흘러 무더운 여름을 향해 가고 있단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평소 자기계발을 위해 사용하는 앱을 켰다가 사진을 등록해야 할 일이 있어 사진첩을 뒤적였다. 조금 더 마땅한 것을 찾느라 열심히 엄지손가락을 놀리다 보니 사진첩의 시간은 2020년 7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의 사진첩에는 아침 기상 시간을 기록한 사진, 읽은 책의 페이지를 기록한 사진, 직접 만든 요리를 기록한 사진들이 가득했다. 맙소사. 어쩜 이렇게 똑같지. 안 그래도 요즘 무엇을 해야 이 처지는 몸과 마음에 활력을 줄 수 있을까 고민 중인데 그때의 나 또한 한여름 목전에서 피어난 무기력을 떨치고 싶어서 난리의 난리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 시간을 잘 활용해 보겠다며 어떻게든 눈을 뜨고, 읽어 보고 싶었던 책을 어떻게든 펼쳐 들고, 내 손으로 만들어 보겠다면서 주방을 들락날락하면서!
이맘때는 낮은 뜨겁고 무덥지만 밤은 선선해서 낮과 밤이 바뀌기 일쑤다. 시원한 공기에 갑자기 눈이 말똥말똥해지니까. 그러니까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하루가 늦게 시작되고, 몸이 처지고, 계획했던 일들이 밀려서, 스트레스까지 받는데, 이 악순환이 내 의지대로 끊어지지 않아서 미치는 그런 시기. 이때가 다가왔음을 날씨뿐만 아니라 감정으로도 느끼는 건지 요즘의 나는 잡생각이 많다. 쨍한 햇볕과 생동감 가득한 거리의 소음과 달리 내가 서 있는 이 공간과 분위기는 그렇지 않아서, 작고 초라한 기분에 사로잡혀 괴롭다. 이 기분은 무시무시하다. 사로잡힐수록 내 안의 열등감과 비교 의식을 키운다.
자기계발 앱을 켠 것도 이 때문이었다. 뭐라도 하는 사람들 곁에 빌붙어 ‘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에요’라고 말해야겠다 싶었다. 책을 펼쳐 든 내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 나 자신에게 ‘너도 열심히 하고 있어’라고 말해야 살겠다 싶었다. 그런데 작년의 나도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이맘때가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나는 이맘때 이렇게 되는 아이인 건가 궁금해진다.
그렇게 미리 만들어져 있던 책 읽기, 필사하기, 외국어 공부하기 모임에 끼려다가 번역가들(또는 번역가 지망생들)과 함께 힘을 내어 보고 싶어서 급작스레 비공개 모임을 만들고 모집글을 올렸다. 현재까지 신청자는 0명. 충분히 환급받을 수 있지만 참가비가 있어서 그럴까, 아니면 특정 앱을 사용해야 해서 그럴까. 모집을 마감하는 날까지 한 명도 없을 것 같다. 아쉽기는 하겠지만 상처는 받지 않을 예정이다. 나의 타이밍과 그들의 타이밍이 달랐다고 생각하면 되지, 뭐. 이 시기를 벗어나고 싶은 절박함과 원치 않게 얻은 무기력함을 타인에게 공개함으로써 스스로의 마음 상태를 긍정(肯定)한 것만으로도 나는 약간의 개운함을 느끼니까, 괜찮다.
여담이지만 브런치를 통해 종종 클래스/모임 개설 제의를 받는데, 딱히 준비한 것도 없고 무언가를 알려 줄 만한 내공도 부족하다는 생각에 고민만 하다가 회신을 하지 못했다. 메일을 보낸 담당자분들께 나는 여러 명 중 한 명이었지만 나에겐 예기치 못하게 다가왔던 빛 같은 제안이었는데, 그렇게 흘려보내 상대에게 미안하고 나에게 답답함을 느낀다. 여름은 무기력증에서 벗어나려고 나를 안달 나게 만드는 계절이며 바꿔 말하면 도약을 준비시키는 혹독한 시기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이 시간 동안 주저 앉아 있을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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