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는 버티기
미술, 피아노, 바둑, 서예, 글짓기.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유난히 덜렁대고 지구력이 부족한 나를 위해 엄마는 끈기를 기를 수 있는 수업에 많이 참여시켰다. 꼭 그래서라기보다 다양한 소양을 갖춰 부족함 없도록 해주고 싶은 그야말로 '엄마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저 놀고 싶은 어린이는 엉덩이 붙이고 오래 앉아 있는 일이 지겨워 멋대로 연습장의 포도알을 채운 뒤 적당히 시간을 떼우다 선생님을 찾아가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자발적으로 몸을 일으켜 운동복을 챙겨 입고 운동화의 끈을 단단히 조여 맨다. 달릴 때마다 모자란 숨을 참고 떨려오는 다리에 힘을 준다. 100미터만 더, 1키로만 더. 적당히 떼우려던 태도를 어떻게든 뿌리치려 들고, 1분만이라도 오래 버티려고 든다.
그러고 보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10시간 넘게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고치거나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친한 지인들 중 내가 제일 오래 앉아 있고 의자 위에서 가장 오래 버틴다. 주말이라고 예외는 없다. 태블릿에 원고 파일을 옮겨 담고 조금 더 완벽해질 때까지 버틴다. 초교, 재교, 삼교, 사교. 4번의 교정을 하는 일이 스스로도 지겹고 힘들지만 이제는 포도알을 볼펜으로 까맣게 채우고 적당히 시간을 떼우다 마감일에 원고를 넘기는 일 따위 상상할 수 없다.
문득 달리다 보니 어릴 때는 가만히 있지를 못해 외부의 힘을 빌려 어떻게든 앉히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너무 앉아 있느라 문제여서 스스로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난리다. 생각해보니 사춘기로 인해 극심한 내성적 성격으로 변해버렸을 때도 그나마 좋아하는 영어/일본어 어학원을 보내 뭐라도 떠들게 만들고 학교 연극부에 들어가 배우를 하며 무대에 서게 만들었다. 균형 잡힌 삶이란 무엇이며, '적당히 고루 갖춘 사람'이란 어떤 때에 될 수 있는 걸까.
비슷한 맥락에서 당겨오는 오른쪽 옆구리를 모른 척하며 뛰고 또 뛴다.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호흡을 조절하고 옆으로 펼쳐진 바다 풍경을 보며 달릴 때는 참으로 즐겁다. 점점 숨이 차오르지만 몸이 더워지고 땀이 흐르고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또 다른 러너를 보며 즐거움을 느낀다. 가끔은 지지 않으려 달리기도 한다. 같이 뛰고 있는 사람을 제치고 싶다거나 한 것은 아니고, 하루하루의 삶이 버겁고 알 수 없는 미래와 나만 행복하지 못하다는 두려움과 불확실성에 지지 않기 위해 뛴다. 혹은 그냥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지 않는 한, 나는 이 몸을 최대한 오래 그리고 잘 빌려 쓰고 싶다. 그래야 글도 더 쓸 수 있고 맵고 짜고 몸에 안 좋은 것도 한두 번씩 입에 댈 수 있고 엄마 아빠와도 실 없는 소리를 하며 웃을 수 있고 옮긴이의 삶도 지속할 수 있다.
어릴 때 배운 버티는 법은 지금의 삶을 위한 것이었으려나. 갑자기 전화가 하고 싶다. 엄마 나 이제 무너지는 순간이 있더라도 잘 버티게 되었는데. 내가 부끄럽지는 않지? 대견한 거 맞지? 그러고 보니 글짓기 학원에서는 웅변도 같이 가르쳐서 나는 우렁찬 꼬마 연사로서 학원을 주름잡기도 했다. 당차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해서 어른들 예쁨을 듬뿍 받았더랬지. 그런데 지금은 어떻지. 그저 불안에 떠는 30대 중반 같은데. 아, 그만그만! 행복하게 달려 놓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렇게 생각이 많아지는 게 제일 싫다. 오늘은 내 두 다리로 처음 5키로를 달린 날인데 하필 옆에 아무도 없네. 빨리 가서 사이드 플랭크를 해야겠다. 걸어가는 동안 옆구리에 붙어 버린 쓸데없는 고민도 떼어 버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