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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Feb 01. 2019

회색 지대의 향연

단어 시리즈 4 - 회색 지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아니,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장면이라고나 할까. 요새 일본어 공부를 위해 넷플릭스와 후지 텔레비전이 함께 제작한 <테라스 하우스>를 보고 있다. 한 집에서 남녀가 함께 생활하며 썸을 주구장창 타는 프로그램으로, 예전에 일본어를 공부할 때 애니메이션과 드라마만큼 효과가 탁월했던 것이 없었던 기억이 있어 추천 프로그램을 검색해보았다가 발견한 이후로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보고 있다.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일본어가 술술 흘러나오니 회화 공부에 굉장히 좋다. 무엇보다 요새 일본 젊은이들이 쓰는 날 것 그대로의 일본어가 살아 있어서 학습자 입장에선 더욱 만족스럽다.



프로그램 멤버 중 한 명이 생일을 맞아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생일을 맞은 남자가 이 프로그램이 끝나더라도 가끔 만나 편안하게 밥을 먹는 사이가 되고 싶다면서 각자가 가진 생각이나 비전 등을 공유하고 싶다는 장면이 나왔다. 대화의 흐름을 타고 한 여성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는데, 그 얘기를 듣더니 명확한 비전이 아니라는 은근한 비난이 시작됐다. 여자는 너무 모호하고 추상적이라는 평가에 자기 나름대로 부연 설명을 붙여 말을 이어갔지만 남자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 장면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지금 당장 ‘50살에 나는 이런 일을 할 거야’라고 선포하지 못하면 꿈이 없는 사람인 걸까? 아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있어, 요새?! 나는 그날, 울음이 터진 여성의 마음에 감정을 이입하며 찜찜한 기분으로 서비스 툴을 종료했다.



어릴 적부터 목표를 세우고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해왔던 사람의 경우, 목표가 없는 사람보다 앞서 나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우월감에 젖기 쉬운 게 아닐까 싶다. 영상 속 남자는 어린 나이에 ‘최고의 탭 댄서’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고, 젊은 나이에 어느 정도 원하는 위치를 얻어냈다. 그래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비전을 나눠주면 그에 맞춰서 서포트를 해줄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명확하게 얘기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의 목표를 듣고 실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도 참 예쁘긴 한데,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네가 뭔데 그걸 깨우쳐주려고 하는 거야? 당신이 뭔데 꿈을 찾아가는 도중에 있는 사람에게 명확하지 않다는 평가를 내리는 거야?’



성장 속도(?)가 남달랐던 나는 주변의 부러움과 칭찬을 많이 듣고 자랐다. 한글도 가르쳐준 적 없는데-진짜로! 동화전집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 것 같긴 하다-눈치껏 조금씩 구별하기 시작했고 걸음마를 뗀 건 9개월 내지 10개월이었으며 외국어 습득 속도도 빨랐다. 이빨도 너무 빨리 나서 남들에 비해 이빨도 빨리 빼고 다녔고, 초등학교 때는 반에서 가장 키가 커서 항상 맨 뒤에 앉아야 했기에 짝꿍 없이 외로운 시절도 많이 보냈다. 내가 계획적이고 의외로 자기관리를 할 줄 아는구나라고 느꼈던 건 중학교 2학년 때. 시험공부 방법을 알려주시는 담임선생님의 조언을 따라 계획을 세워 공부를 했더니 매우 효율적이고 또 성적이 쑥 올라가는 경험을 하면서였다. 그 이후로 캘린더와 플래너를 애용했고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계획 세우는 시간을 먼저 가졌다. 그러나 그때부터 예측한 범위를 벗어나면 쉽게 마음이 초조해졌고 계획적이지 않은 성향의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불편해했다.



대학 때도 목표가 없는 동기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불안한 건 맞다. 전공이긴 하지만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잘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실 늘 해보고 싶었던 일은 너무 생뚱맞은 것 같고, 영업·마케팅·인사·회계 등 원하는 업무도 잘하는 업무도 없어 그저 안정적인 공무원 시험 준비에 돌입하겠다는 발상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친구들은 전부 합격했다. 지금 와서 현실에 비춰 보면, 나에 비해 정년까지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게 꽤 부럽긴 하다) 그래서 왜 꼭 부모의 눈치를 보고 형제자매의 상황을 봐 가며 너의 꿈을 포기하고 해보고 싶은 걸 다 접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조언한 적이 많았다. 확실한 목표를 세워 도전해보고, 부딪혀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도전 자체에 의미를 두면 되는 건데,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게 불편하다는 속내를 내비친 적도 많다. 참으로 거만하고 교만했다. 모두에게 주어진 상황이라는 게 있고 구체적으로 비전을 다듬어 나가는 시기란 게 있는데.



아니, 생각해보면 꿈이란 건 꼭 존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만 세상적으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을 줄여줄 순 있겠지만, 주어진 오늘을 얼마나 더 행복하고 감사하게 사용하는가가 더욱 중요한 것인데 말이다. 세워도 어그러지는 게 계획이고 오늘 꿈꿔도 내일 달라질 수 있는 게 비전이기에,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보다 애매한 회색 지대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더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를 추구하기 때문에 흰색 아니면 검정색으로 서둘러 옮겨가고 싶어 하지만 광야 같은 회색 지대 속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야말로 나를 돌아보고 마음을 재정비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때론 확실한 색깔을 지닌 사람이 부러워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회색에는 회색만 줄 수 있는 편안함과 매력이 있다.



그때 울음을 터뜨렸던 일본 여성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직 모든 에피소드를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프로그램을 통해 남자친구는 사귀었을까? 추상적이었지만 그때 말한 비전을 구체화 시켰을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계획을 세웠을까?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혹시라도 우연히 만나는 기회가 생긴다면 굉장히 멋진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때의 생각과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꾸준히 잘해나갈 수 있다고 토닥여주고 싶다. 비록 나보다 어리지만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이 나와 닮은 것 같아서, 그리고 꿈을 이야기 할 때 눈을 반짝이는 모습을 닮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의 그러려면 일본어 공부를 더더욱 열심히 해야겠지. 그녀의 회색 지대를 응원하기 위해, 나의 일본어 회색 지대를 벗어나고자 오늘도 고군분투해야겠다.


전 회색이 좋아요. 얼마 전 강남역에서 회색 코트도 샀는 걸요. 호호. 설 명절 잘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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