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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Jul 28. 2023

지쳤다면 외치자, ‘status quo is okay’

며칠 전 좋았던 문장을 올린 인스타그램 피드에서도 소개했었지만, 이 말은 요즘 자주 듣고 있는 EBS Power English에서 호스트끼리 대화를 하다가 나온 말이다.

초입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한 명이 '나도 그냥 하루하루를 잘 넘기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말이다(I'm doing okay. I'm just hanging in there, like many people)'라고 하면서 뒤이어 이런 말을 했다.


it's okay if you're not making any sort of progress, I think right now, just status quo is okay too.

(번역: 눈에 보이는 성과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더라도 괜찮아요. 지금은 그런 시기 같거든요. 현재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이 말을 듣자마자 여러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상쇄'의 이미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쉬지 않고 달리고 있으나 맞은편의 거센 바람에 의해 제자리를 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러너의 상(像)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열심히 달리고 있으니 무언가를 분명히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꾸준히 플러스를 만들어내려 하지만, 이에 맞서 마이너스에 해당하는 바람이 자꾸 불어오니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아이패드에 직접 써 봤다. 살짝 패러프레이징 해서.


그러면서 그동안의 여러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매일 아침 어떻게든 눈을 뜨려 안간힘 쓰는 나, 무더운 날씨 탓인지 7시간의 수면을 취해도 눈을 뜨는 순간부터 피곤한 나, 불안한 마음에 졸린 눈으로 머릿속에 들어오든 말든 문법 책과 영단어를 쳐다보는 나, 일을 하고 찾고 고민하는 나... 무언가를 나름대로 하고 있지만 별다른 소득도 결과도 없고 시간만 흘러가는 것 같아 마음이 내심 편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status quo만으로도 괜찮다니. 이런 멋진 위로가!


뭐라고 하면 좋을까, 덧붙여 영어가 주는 특유의 뉘앙스가 참 좋았다. hanging in there 이라는 말이 주는 버팀, 견딤, 매달림의 느낌 말이다. 이건 번역을 못하겠다. 내게는 이를 악물고 철봉에 매달려 마이너스를 내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느낌이 든다. 요즘의 기분이 과하게 반영된 걸 수도 있지만.


이렇게 힘들게 버텨(hang in) 만들어낸 것이 어떤 성과나 발전(progress)이 아닌 평범한 하루(status quo)라니, 씁쓸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뒤처지지 않고 묵묵히 하루를 살아냈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게 아닐까(그러고 보니 이런 식의 영어 칼럼을 신문에서 본 것 같다).


얼마 전 만난 지인이 요즘 좋아 보인다는 말을 했는데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나도 정말 just-hanging-in-there days를 보내고 있다. 모두와 마찬가지다. 몸도 아파 약도 먹고 있다. 무더위의 폐해일 거라 생각하며 꾹 참고 모든 게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게다가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생각지도 못한 어느 날, 가을을 알리는 선선한 아침 바람에 잠을 깬 내가 지나간 시간들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며 남몰래 눈물 지을 거란 사실을. 그러니까 지금을 잘 살아내고 있는 나를 수용해 줄 거다. 이러저러한 것들을 빨리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조금 못했어도 그러려니 해주되, 때로는 시원한 도서관과 스터디카페로 도망 나가는 전략을 펼치며 하루를 열심히 보낼 거다. 아침 메뉴 고르듯 하루를 살 거다. 무슨 말이냐고? 오늘 팔도비빔면 못 먹었다고 원통해하며 울고불고 난리 치지 않듯, 적당한 포기와 적당한 타협과 적당한 선택을 아우르는 거다. 그럼 사람이 덜 비장해진다. 물론 가끔은 오픈런까지 해가며 맛집의 우동을 챙겨 먹는 열정도 발휘해 준다면 슴슴한 일상이 조금 더 재밌어지지 않을까.


어쨌든 status quo도 괜찮다. 지쳤다면 이 영어 한마디를 기억해 보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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