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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Mar 01. 2019

이것, 그것, 저것, 어느 것

말 시리즈 - 대체 그것이 어느 것이란 말이오?

사람들과 만나 일상을 나누던 중, 취업 준비 중인 아는 동생이 말했다. 여러 명이 함께하는 일일수록 소통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고 말이다. 꽤 오랜 기간 인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동생은 마지막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기 위해 사람들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한번은 의사소통에 오류가 있어서 살짝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한참 회의를 하고 나서도 나중에 보면 말이 다 달라서 대체 왜 그러는 것인지 이유를 곰곰이 되짚어보니 서로 말 속에서 가리키는 것이 달랐기 때문인 걸 깨달았다고 한다. 덧붙여 다들 말을 할 때 정확하게 주어나 목적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준에서 ‘그거’ 또는 ‘저거’로 얼버무려 표현하는 습관을 갖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었다고 한다.



중요한 회의뿐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이런 상황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한참 같은 주제로 신나게 떠들어 놓고서 마지막에 ‘그래서 이걸 이렇게 하자는 거지?’라고 물으면 ‘응? 아니, 그거 말고 저거. 지금까지 그 얘기했던 건데?’로 되받아친다. 서로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던 대상이 달라 대화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부모님의 대화에서도 이런 현상을 자주 발견하곤 한다. 분명 두 분이 대화 중인 내용은 A와 B에 관한 이야기인데, 어느샌가 이 A와 B가 ‘이것’과 ‘그것’으로 둔갑하면서 엄마에겐 A가, 아빠에겐 B가 ‘이것’이 되는 요상한 상황이 생겨난다. 그러다가 마지막 결론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대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즐겨 읽는 번역 서적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내가 상대의 입장이 되면 빨리 해당 사안과 관련된 내용을 안내받고 생각할 시간과 검토할 시간을 원하면서, 정작 본인은 그런 배려 없이 관련 사항을 직전에야 알린다고. 그래서 다른 이에게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번듯한 형태로 만들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만 한다고 말이다. 이 부분을 읽고 스스로도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은 사항을 미리 말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결정을 낸 다음 말해도 상관없지 않나 싶어서. 뭐 기획과 경영을 하는 사람 입장은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일을 미리 얘기했다가 괜히 얘기했나 싶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취직이나 소개팅, 사업 준비 등이 대표적인 예다. 뭔가 될 것 같아서 신이 나는 마음에 입이 근질거려 얘기를 해두었는데, 생각보다 진척이 없으면 살짝 민망한 얼굴로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시 새로운 결과를 보고 해야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내일 일을 섣불리 말하지 말라는 성서 구절이 백번 옳다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얼마 전 책 속의 문구가 완벽하게 이해되는 상황을 만났다. 함께 합창단을 하고 있는 동생 한 명이 자긴 오늘부로 이 합창단에 나오는 게 마지막이라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무척 아끼고 예뻐했던 친구라 깜짝 놀라서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냐고 했더니 사실 한두 달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 몰라 상황을 보다가 말해주려고 했더니, 어쩌다 시간이 흘러 오늘이 되어 버렸다고 설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간단한 귀띔 정도는 해줄 수 있었던 거 아닌가 하는 서운한 마음이 올라왔다. 말을 해줬더라면 그때처럼 당황스럽고 놀라운 감정까지 느끼진 않았을 텐데. 순간, 책 속의 한 구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상대방이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혼자 꽁꽁 싸매두지 말고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말이다.



내 머릿속에 잘 정리가 되지 않았어도, 나에게조차 ‘이것’과 ‘그것’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더라도 말을 해주었다면 쉽게 해결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구체적이지 않아도 생각하는 바를 전달하면 상대는 그 말을 듣고 고민과 검토의 시간을 갖게 된다. 또 우리가 말하는 ‘이것’이 같은 대상인지를 확인할 시간도 갖게 된다. ‘거시기’ 하나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는데, 반대로 ‘거시기’ 덕분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나야 하고 싶은 말을 거시기로 바꿔버리면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그걸 다 알았다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가? 상대방의 거시기가 내 거시기와 일치하는지 대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35년을 함께 산 부부도 말이 달라 매번 싸우는데 말이다.



때론 나의 기준에서 편리하게 생각하기보다 듣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확실하게 언급해주어야 소통에서 생기는 오류를 줄일 수 있다. 나의 ‘그것’이 상대방에게도 ‘그것’인지 확인하고, 뭔가 정확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면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되짚어 보는 정성이 나에게도 그리고 상대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야 서로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이 주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분명히 말했으니 잘못 알아들은 건 그쪽이다라고 얼버무린다면 그 관계도 순식간에 얼버무려지고 말 것이다. 뭐, 그런 관계가 되어버려도 괜찮은 사람이라면 딱히 할 말이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곁에는 얼버무려져도 좋은 관계조차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분들이 얼버무리지 않고 큰 목소리로 '만세!'를 외치신 날이네요. 그 기개에 감탄 또 감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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