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꼰대'도, 그리고 '듣는 꼰대'도 되고 싶지 않다
‘꼰대가 꼰대인줄 알면 꼰대겠습니까.’
얼마 전 읽은 책 속에서 만난 한마디. 검색을 해보니 어느 앵커가 특정 인물의 행동을 따끔하게 비판하며 클로징 멘트로 남겼던 말인데―최초로 사용했는지 등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어록에 남을 만한 명언이라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어쭙잖게 남을 걱정하듯 건네는 한마디, 그리고 내가 너보다 잘 안다는 식으로 상대를 낮춰 보며 건네는 한마디는 그 어떤 말보다도 폭력적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진심이라는 탈을 쓴 채 ‘허영과 교만 가득한 조언’을 건네니까 꼰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쓴 소리 한마디 했다고 꼰대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듣는 사람도 진실한 걱정과 쓴 소리의 진정성 정도는 구별할 줄 안다. 내 맘에 안 드는 한마디 들었다고 꼰대라고 손가락질 해버리면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가 꼰대인 것이겠지.
가끔 같은 아파트 동 건물에 사는 아주머니를 만날 때가 있다. 가볍게 안부 인사 정도는 주고받는 편이라 만나는 것이 마냥 불편한 것은 아닌데, 그날따라 왜인지 나보다 삼십 발자국 먼저 걷고 계신 아주머니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기가 어색해 일부러 편의점에 들렀다. 아무리 어슬렁거려도 딱히 살 것이 없으니 빨리 편의점 밖을 나오고 말았는데, 결국 아주머니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서 있는데 아주머니께서 말하셨다. “언제 결혼해? 얼른 결혼해서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허허. 왜 이상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걸까.
때가 되면 하지 않겠냐는 내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우리 집인 7층까지 올라가는 짧은 시간 동안 아주머니는 내 나이를 묻곤 속사포로 얘기를 이어가셨다. 본인도 결혼을 늦게 한 편이었는데 살아보니 아이도 빨리 낳는 편이 좋고, 키우는 것도 젊을 때 키워야 된다는 걸 알게 됐다고. 뭐든 젊을 때 하는 게 좋으니 얼른 시집가야서 애 낳아야 하지 않겠냐고. 이 얘기를 족히 백 번은 넘게 들어본 내가 생긋 웃으며 말씀드렸다. “제가 할 때가 되면 다 알아서 하겠죠.”
어느 지인이 말했다. 본인의 동료가 어느 후배와 그룹 프로젝트를 함께하는데, 후배가 자꾸만 독단적으로 움직이곤 해서 확실히 내용을 공유하고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조언을 했다가 ‘꼰대처럼 이러쿵 저러쿵한다’는 뒷말을 듣고 속상해해서 마음이 아팠다고. 나의 경우 TV 채널을 돌리다가 누가 가장 꼰대인가를 가려내는 프로그램이 방영 중인 걸 본 적이 있는데, 생각해볼 만한 주제를 많이 던져 주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보기 불편해서 채널을 금방 돌렸다. 해당 에피소드의 출연자는 10대에서 20대 초반 여성으로 구성된 걸그룹이었고, 꼰대로 지목받은 한 멤버의 실체를 폭로하겠다면서 몇몇 멤버들이 하소연을 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나중에 기사 전문을 읽어보니 왜 답답해하는지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생각이 많아졌다. 내 맘대로 살 거니까 말리지 말라는 당돌한 외침 앞에 그저 입을 다무는 것만이 꼰대가 아니게 되는 지름길인 걸까. 사회적으로 대두된 ‘꼰대 이슈’를 바라보며 수많은 인생 선배와 후배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는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가를 무수히 고민했다. 분명 도와주고 싶어서 말을 건넸는데 내 의도와 달리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의 의견과 반대되는 말을 했다가 곧장 꼰대 딱지가 붙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꼰대’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늙은이를 이르는 은어’로 규정되어 있다. 어느 앵커의 멘트를 빌려 이렇게 수정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꼰대, 생각이 낡은 자를 이르는 말.’ 나이가 든 물리적 어른이라고 해서 자신이 대우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마땅하게 주장하기보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동등하게 대우하고,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함부로 강요하지 않는 사람은 주변에서 알아서 받들어 모신다. 어찌해야 좋을지에 대한 해답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꼭 기억해야겠다. 나이가 10대든 50대든, 낡은 생각을 가진 자는 누구나 꼰대가 될 수 있음을. 우리가 시덥잖은 소리를 싫어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 후배도 시덥잖은 소리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대체 내가 싫으면 남도 싫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 걸까. 그래, 그걸 알면 꼰대가 꼰대겠는가.
아주머니와의 대화를 되짚어보며 그런 생각을 해봤다. 아주머니를 만난 그날, 만일 내가 어떠한 상처로 인해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었다면? 혹은 결혼을 했는데 어떠한 사정으로 아이를 갖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었다면? 혹은, 아이를 갖기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노력 중인데 나의 열심과 달리 아이가 생기지 않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었다면? 돌이켜보니 그때가 좋았더라고 고백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본인에게 달렸으며 철저하게 당사자의 몫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 사람에게만 주어진 고백의 순간이 있음을 무시하지 말았으면. 그리고 지극히 주관적인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았으면. 내가 ‘결혼 못한 애’라는 자기 연민과 자존감 상실에서 회복된 사람이라 무척 다행이었다.
꼰대스럽다 형용사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려 드는 데가 있다.(우리말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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