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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Mar 08. 2019

나만의 공간

당신을 감싸 안는 그곳은 어디인가요?


안 좋은 습관이 하나 있는데, 일을 하다가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켜는 것이 그것이다. 문자도 안 왔고 확인해야 할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일단 잠금화면부터 깨우고 본다. 마치 잊고 있었던 해야 할 일이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그렇게 가끔 SNS에서 <슈퍼맨이 돌아왔다> 영상을 보곤 한다. 출연하는 아기들이 너무 귀여워서 몇 번 찾아봤더니 이젠 알아서 큐레이팅을 해준다. 아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내 추천 검색창에는 연예인 아기를 넘어 좀 인기 있는 일반인 아기들도 등장한다. 아이디를 눌러 계정을 확인해보면 귀여운 아기의 모습과 날씬하고 예쁜 엄마의 사진으로 가득하다. 올리는 사진은 이게 전부인데 팔로워도 이렇게 많고 ‘좋아요’ 숫자도 이렇게 많다니. 이런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의 하루는 어떨까, 뭘 어떻게 해서 벌어 먹고사는 걸까 궁금한 적이 많다.



어쨌든, 방영일을 앞두고 예고 영상이 공개됐다. 아주 작은 촬영용 부스 안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않는 아이를 위해 유아용 텐트 하나를 쳐주는 영상이었다. 눈앞에서 예쁜 집 한 채가 뚝딱 만들어지는 걸 바라본 아이는 흥을 감추지 못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작은 공간 속 바닥에 깔린 푹신한 이불 위에서 잠옷 차림으로 젖병 하나를 입에 문 아기의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빽빽하게 들어찬 도심의 아파트를 보며 내 집 하나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한 사람들이 많다는데, 거실 한구석에 마련된 자기만의 공간에서 아기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즐거워 보였다. 두 살이 된 아기든 환갑이 넘은 어른이든 오롯이 ‘내 공간’이 있다는 건 누구에게나 좋은 거구나라는 생각이 다시금 머리를 스쳤다.



아홉 살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방’이 생겼다. 거기엔 새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나만 눕는 내 침대도 있었다. 내게는 궁궐과도 같아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엄마에게 궁궐 같다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장난감과 내가 좋아하는 책과 내가 좋아하는 옷들로만 꾸며진 내 방. 매일 공주님이 되는 꿈을 꿀 것만 같았던 내 공간에 즐거워했던 때가 떠올랐다. 삶의 무게가 늘어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읽어야 하는 책들과 풀어야 하는 숙제들과 써야 하는 자기소개서들이 점점 더 방을 차지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나를 단단하게 감싸 안아주는 내 방이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된다. 어느새 쉼터이자 작업장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고 있는 내 방. 넘어지고 부딪히고 깨지고 환희하고 기뻐하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존재하는 이곳. 하지만 걱정 하나 없이 젖병 하나를 문 채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이 유독 부러운 건 왜일까. 좋아하는 공간에서 해야 할 일과 벌어야 할 돈 생각에 짓눌려 있는 건 참으로 불쌍하고 또 할 짓이 못 되는 것 같다.



좋아하는 공간을 예쁘고 깨끗하게 다뤄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날마다 하나씩 버리기>를 읽고 빼기의 미학을 실천한 적도 있다. 오늘은 뭘 버릴까 즐겁게 고민하며 방을 조금씩 비워 나갔다. 무언가가 놓여 있던 자리가 말끔해지는 걸 보며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래, 여기가 원래 이런 색이었지라면서. 앞으로는 내 방은 물론 머릿속 공간도 하나씩 비워봐야겠다. 나는 생각하는 거 참 좋아하는데, 미래를 꿈꾸고 계획하는 일을 참 좋아하는데 요새 이게 참 버겁다. 잿빛 하늘처럼 마음도 잿빛이라 자기 연민에 빠질 것 같은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오늘은 밝은 햇빛이 창문을 스친다. 한 외국인 친구가 자기는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다는 뜻 말고도, 힘들었던 일도 나중에 돌아보면 좋은 추억이 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면서. 속 깊은 한마디에 나를 홀딱 반하게 만들어놓고 요즘은 대화 한 마디 잘 못 하지만, 그때 그 대화를 가끔씩 떠올려보곤 한다. 광야를 걸어야 하는 때가 있다면 저 멀리 보이는 쉼터에서 따스한 온기를 만끽하는 때도 존재한다는 뜻이니 말이다.



TMI겠지만, 여기가 매일 지지고 볶는 제 공간입니다. 오후 네 시엔 요렇게 예쁘게 햇살이 들어 와요. 단, 현재 프레임 바깥 상황은 전쟁터랍니다. 호호.


글에 모티프가 된 영상입니다. 너무 귀여워요. ㅠㅠ https://tv.naver.com/v/5604977



일상에서 느낀 요즘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블제이 스튜디오 https://blog.naver.com/kk646

프리랜서의 일상 @yeonbly_i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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