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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Mar 22. 2019

처음으로 모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언제나 무한할 것 같은 시간이 유한한  순간으로 변하기 전에.

엄마와 첫 모녀 여행을 다녀왔다. 늘 말만 하고 추진하지 못했는데 드디어 해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엄마에게 서로 시간이 맞을 때 여행을 가야 한다고 여러 번 주장했다. ‘그래, 한번 가야지’라는 말만 했다가는 평생 못 가게 될 거라며 지금 움직여야 한다고 설파했지만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친구와도 떠나고 혼자서도 떠났는데 엄마와는 떠나지 못했다. 내가 시간이 되어 여행을 가자고 하면 엄마에게 일이 있었고, 엄마가 조금 한가해지면 내가 일을 시작하곤 해서 항상 타이밍이 엇갈렸다. 언제나 무한할 것만 같은 가족과의 시간은 예상치 못한 어느 순간 유한한 기회로 변한다. 혹은 아예 없어지기도 한다. 이 사실을 크게 절감했기에 더더욱 떠나려고 했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도 가야겠지만 여자 둘이 꼭 떠나보고 싶었다. 엄마와 딸이자 세대를 거슬러 필연적으로 만난 친구라는 이름으로. 엄마의 두 번째 해외여행이자 첫 번째 일본 여행을 함께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쁘고 다행이었다. 떠나기 전날까지는 역시나 모자란 잠과 피곤함과 일을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지만 말이다.



엄마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무척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그곳의 날씨는 어떤지 종종 묻기도 했고 어떤 옷을 가져가면 좋을지 고민했다. 수학여행 가기 전날 밤, 친구와 전화기를 붙잡고 뭘 입을지 한 시간 동안 떠들었던 그때처럼 내가 잠시 일을 쉴 때마다 옷을 보여주며 검사받기를 원하셨다. 아닌 척해도 여행용 짐 가방은 뭘 가져가면 좋을지 창고를 열어 보기도 하고, 여행 출발 날짜에 맞추어 예쁘게 셀프 염색도 하셨다. 여행사에서 미리 문자로 전송해준 여행 일정표도 들여다보시곤 했다. 그런 엄마를 몰래 훔쳐보며 나 또한 인터넷으로 해당 지역의 날씨를 매일같이 검색했다. 이렇게 기대하는 사람에게 맑고 깨끗한 날씨가 선물로 주어진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았다.



아빠는 서운하겠지만, 엄마와 단둘이 떠나는 모녀 여행을 반드시 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건 약 3년 전 엄마가 아팠던 일이 계기가 됐다. 조직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묘한 직감을 마주한 우리 둘은 암묵적으로 ‘혹시 모르는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무서운 병명이 주어질지도 모르는 내일, 갈수록 두려움이 커지는 내일, 그리고 엄마가 곧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르는 내일. 자꾸만 늦어지는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하루는 엄마와 함께 나트륨이 98% 함유됐다는 인스턴트 콩나물 라면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심심한 병원 밥 대신 맵고 짠 편의점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 먹으며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진짜 맛있다면서.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선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우리 엄마 아직 데려가지 말라고.



두 달 전쯤 개인적인 욕심으로 비행기 표를 예매해두었다. ‘집필’과 ‘나를 향한 투자’의 목적이라며 합리화를 마쳤지만 왜인지 부모님께 미안해서 이 사실을 언제 말하면 좋을지 눈치만 살살 보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한 달 전쯤 방으로 찾아와 답답해서 바람 좀 쐬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만큼 속이 뜨끔했던 기억은 없다. 조금만 일찍 찾아와서 답답함을 호소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나대로 가고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여행을 보내드린다 해도 없는 주머니 사정에 돈을 두 배로 쓰게 생겨서 미칠 노릇이었다.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이번 기회를 모녀 여행으로 하자고 마음먹었다. 대신 교통편에 숙소까지 전부 알아볼 기력은 없으니 패키지여행으로. 한 칸 더 늘어난 카드 할부와 자꾸만 비어가는 비상금 통장을 보며 무척 마음이 어려웠지만, 정갈하게 차려진 음식과 깨끗한 하늘과 친절한 사람들 앞에서 소녀처럼 웃는 엄마를 보니 참 잘했다 싶었다. 우리 엄마는 지금까지 나를 위한 낭비를 서슴없이 해온 사람인데. 그래, 이 정도 낭비가 뭐 어때서.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씩씩하게 일해 왔던 엄마는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작은 아이가 됐다. 혼잡스러운 아침 공항 풍경 덕분에 오랜만에 엄마와 자주 손을 잡고 다녔다. 서로의 손을 잡아본 지가 오래되어 기분이 이상했다. 생각해보니 엄마랑 팔짱을 끼곤 했어도 손을 맞잡고 걷는 일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싶다. 손이 많이 거칠고 작아서 새삼 놀랐다. 짧은 2박 3일 동안 엄마의 손을 가장 많이 잡았다. 누구보다 강한 우리 엄마가 떨리는 마음으로 마주한 낯선 세상에서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도전하려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내 눈엔 해외여행에 익숙해서 비행기 표도 모바일 앱으로 제출하고 미리 사둔 면세품도 잘 찾는 아줌마들보다 훨씬 멋있었다. 나이가 삼십이 넘어도 얹혀사는 데다 오래된 핸드폰 하나 손쉽게 바꿔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엄마는 지금의 하루하루가 즐겁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아직은 부르심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엄마랑 또 여행을 떠나고 싶다.



이번 여행을 한동안 잊을 수 없을 거라던 엄마의 말이 아직도 먹먹하게 남아 있습니다.




일상에서 느낀 요즘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블제이 스튜디오 https://blog.naver.com/kk646

프리랜서의 일상 @yeonbly_iam




Side note: 일본 오이타 지역으로 패키지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요새 보기 힘든 깨끗한 하늘이 3일 내내 이어졌는데, 이 하늘만으로도 사람의 기분과 컨디션이 매우 좋아지더군요. 참고로 저희 엄마는 무척 건강하시답니다.


브이로그도 난생 처음 만들어 봤어요. 엄마가 재미있다며 좋아하셨고 또 고맙다고 하시네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CdCjyyxKynBFfUpkhv74BA


인스타에는 일본 여행 사진을 전부 업데이트해두었습니다. 혹시 궁금하시다면 해시태그를 검색해보세요. :)

(hashtag: #スヨンが合った日本)


https://www.instagram.com/explore/tags/%E3%82%B9%E3%83%A8%E3%83%B3%E3%81%8C%E5%90%88%E3%81%A3%E3%81%9F%E6%97%A5%E6%9C%AC/


말이 길어졌네요. 즐거운 금요일 보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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