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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Apr 05. 2019

하고 싶은 일이 해야만 하는 일로 변해갈 때

꿈을 이뤘더니, 현실이 되었다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예전 직업과 현재 직업을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더 나으냐고. 같은 물음에 늘 같은 대답을 건넨다. 두 가지를 비교하기엔 특성이 너무 달라서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이전보다 현재 삶의 만족도가 더 높은 편인 것 같다고. 대답할 때는 꼭 ‘-인 것 같다’고 말을 끝마친다. 원대한 목표를 이뤄낸 것처럼 뱉어낸 말들이 당장 다음날부터라도 삶 속에 녹아들지 못할까 봐 겁이 나서 그렇다. 사실은 직장을 나오지 않았던 것이 옳았다고 고개를 떨구게 될까 봐 두렵다. 프리랜서로 전향한 지 3년이 되어가는 데도 말이다.



다른 때와 변함없는 오늘. 플래너를 꺼내 해야 할 일을 적어본다. 오늘 안에 다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적고 본다. 일곱 개에서 여덟 개 정도를 적고 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즉 오늘의 ‘1번’을 정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린다. 플래너에 적힌 여러 개의 일들이 자기가 1번이라며 아우성이다. 혼란스럽다. 2번으로 밀려날 만한 일이 하나도 없다. 보기와 달리 멀티태스킹을 잘 못해서 할 일이 한꺼번에 몰아닥칠 때는 이렇게 순서를 정해서 움직인다. 사람들에겐 나를 정보 처리 과정이 느린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머릿속에 입력해 둔 한 가지 일이 일단락되어야 다음을 진행하는 성격이라서 이 ‘순서 매기기 과정’을 꼭 거친다. 겨우 진정하고 순서를 매기고 나니 기분이 묘하다. 분명 다 내가 좋아하는 일인데. 글쓰기도, 책 읽기도, 외국어 공부도, 매일 하고 싶어서 안달인 일들인데 순서를 매겼더니 반드시 해야 하는 일로 변했다. 어깨가 묵직하다. 조금 씁쓸한 기분도 든다.



무슨 일이든지 간에 ‘일’로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마음만큼 따라 주지 않는 게 현실이다. 초심을 잃고 싶어서 잃는 사람은 없다. 대개 눈물로 버텨낸 구직 활동 덕분에 일을 하게 되었지만 어느 순간 몰아치는 회의와 불안함을 느끼고, 퇴사와 더불어 나만의 갭이어(gap year)를 갖기로 결심한다. 여유로움도 잠시, 짧으면 3개월, 길면 1년 정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시간을 보낸 뒤 구직을 시작한다. 취업이 무척 힘들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낀 뒤 찾아낸―혹은 겨우 들어간―회사에서 길지 않은 적응 기간을 마치고 나면 또 하루의 마무리가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이따가 저녁 뭐 먹지?’ 설렘과 기쁜 마음과 호의와 열정이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버렸다. 간절히 원했던 일이 마지못해 해야만 하는 일로 변하는 순간. 그때만큼 허무한 순간이 또 있을까.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불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부심을 느낀다. 피드백을 받을 땐 기가 죽기도 하지만 내 손길을 거친 글이 더욱 보기 좋은 기사로 탄생했을 때 행복함을 느낀다. 한 때는 힘들어도 오래 버티라는 말이 꼰대의 허세처럼 들렸는데, 시간이 갈수록 버팀의 미학이 강력하게 발휘된다는 걸 몸소 체험 중이다. 다만 집중해야 할 때 딴짓을 하거나 가끔은 몸부림을 치거나 지금 쉬면 다음 달 급료가 줄어든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정도랄까.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뛰어난 언어 이해도를 가지고 있으니 누군가의 언어적 플랫폼이 되어주면서 소소하게 벌어 먹고살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는데. 어느 샌가 오늘도 해야 하는 일 또는 오늘 안 하면 안 되는 일이 돼 버려서, 하루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한번은 친구에게 그래도 몇 개 더 번역해야 다음 주 여행에서 커피 한 잔 사 마실 수 있지 않겠냐고 문자 메시지를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번역을 위한 커피인가 커피를 위한 번역인가. 히트곡을 낸 가수는 왜 웃지 못하는가. 대리가 된 사원은 왜 기뻐하지 않는가. 꽁꽁 묶여 버린 실타래의 시작점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기 나름의 본질을 추구하는 꼼꼼한 상사를 탓해야 하나 섬세함과 정성을 요구하면서 그 대가를 건네는데 머뭇거리는 업계를 탓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나를 탓해야 하나.




꿈을 이뤘더니, 현실이 되었다. 현실은, 꿈이 될 수 있을까.




일상에서 느낀 요즘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블제이 스튜디오 https://blog.naver.com/kk646

프리랜서의 일상 @yeonbly_iam


커피 한 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최고의 여유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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