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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Apr 12. 2019

또 다시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이유

나는 재밌는 사람이었고, 얼빠진 구석이 있었으며,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나는 혼자 잘 다닌다. 밥도 잘 먹고 영화도 잘 보고 쇼핑도 잘 간다. 혼자 다니는 게 편해서 혼자 갈 때도 있지만, ‘혼자’라는 존재감을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건 아니다. 처음으로 밥을 혼자 먹었던 건 대학교 4학년 때. 교환학생을 일 년 다녀왔더니 누군가는 어학연수를, 누군가는 이미 졸업을, 누군가는 취업 준비를 하고 있어서 나 홀로 야간 수업을 들어야 했다. 매번 밥을 같이 먹어 달라 불러내기도 그렇고, 집에 가지 말고 저녁밥까지 먹고 가라고 할 수도 없어 은근히 난감했다. 전공 수업이라 아는 얼굴들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어울리는 사이도 아니었고, 밥 먹을 때만 끼어드는 두꺼운 넉살은 더더욱 없었다.



수업은 저녁 6시에 시작해 8시쯤 끝나는 편이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집까지 가는 데만 2시간 반이 걸리기 때문에 끼니까지 거르면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개강하고 한두 주가 지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고 왜 내가 나 배고픈 걸 참아야 하는가. 매주 수요일마다 나는 안쓰럽게 밥도 못 먹고 다니는 애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들이―아니, 체면이―먼저인가, 내가 먼저인가! 사고 정리를 끝낸 나는 인문관 매점으로 향했다. 당당하게 라면과 삼각김밥을 샀다. 테이블에 앉아 혼자 먹었다. 조금 먹다 보니 안 친한 무리가 매점에 입장했다. 혼자 있는 나를 보고 뭐라 말하는 것만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이미 매운 라면 국물과 짭조름한 참치마요 김밥의 동시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사회에 나오니 밥 혼자 먹는 것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이제는 친구들과 휴가도 안 맞았다. 직장인이 되어 월급을 받고 나면 함께 여름휴가를 떠나 놀러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누구는 가고 싶지만 돈이 없다 그러고, 누구는 다음 달에 갈 예정이라 못 간다 그러고, 누구는 연차를 쓸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른단다. 그러나 내가 여행을 갈 수 있는 시기는 지금뿐, 그들의 가능한 시간을 고려하다가는 내게 주어진 휴가마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혼자 여행을 가는 건 왜인지 겁이 나는데... 부모님이 허락해줄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이미 내 가슴은 비행기에 몸을 실은 사람처럼 쿵쾅대기 시작했다. 혼자 밥도 잘 먹고 영화도 보러 다니면서 막상 혼자 ‘떠난다’고 생각하니 손에는 식은땀이 나고 입술은 메마르기 시작했다. 혼자 하는 일에 내가 이렇게까지 긴장했던가? 아니, 이건 긴장이 아니라 설렘이었다. 내가 나와 떠나는 여행을 향한 설렘. 그렇게 나는 몇 번이고 혼자 여행을 떠났다.



친구든 가족이든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이 두 배로 재밌긴 하다. 숙박비도 절감되고 음식도 여러 가지를 주문해서 골고루 맛볼 수 있다. 일부러 구색을 맞춘 것도 아닌데 얘는 길을 잘 찾고 얘는 알아서 공금을 관리한다. 게다가 사진을 서로 찍어주니까 좋다. 숙소에 돌아와 오늘 찍은 사진을 서로 주고받으며 한참 동안 깔깔대는 것도 즐거우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혼자 여행을 떠나본 덕분에 깨달았다. 나는 독립심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과 평소에는 이런 성향을 지긋이 눌러가며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응급 상황이 생기면 딱 부러지게 대처할 것만 같아도 겁이나 무엇부터 하면 좋을지 어쩔 줄 몰라 하고, 소매치기를 당해 암울해진 기분을 의외로 빠르게 회복할 줄 아는 사람이 나라는 걸 혼자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생각보다 재미없지 않았고, 얼빠진 구석이 있었으며, 무언가를 잘 해내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가차 없이 굴었다. 나도 몰랐던 나를 마주하는 시간, 혼자 여행이란 내게 나를 배우는 소소하지만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지나온 여행 과정을 찬찬히 돌아보면 랜드마크 앞에서 찍은 수십 장의 인증 사진보다, 그리고 여행 가방이 터지도록 욱여넣은 과자 보따리보다 그 행동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더욱 기억에 남는다. 지나가다 본 소소한 일상 풍경과 분위기가 향수를 자극하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장면이 여행지에서라면 왠지 특별하게 포착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혹시 나는 그동안 너무 무관심하게 내 주변을 살폈던 건 아닐까. 드높아지려는 내 마음을 비우게 되고, 뒤처지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던 어깨에 힘이 풀린다. 이렇게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혼자 여행의 참 묘미는 일상에서 발휘된다. 타지의 경험을 오래도록 추억하며, 언젠가 또 떠나게 될 다음 여행을 기대하며 하루를 버틴다. 요지는 오래도록 추억하고 기대하는 데 있다. 나는 내가 속한 일상 풍경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지금을 비난하면서 사표를 던질 틈새만 엿보거나 정면으로 부딪쳐보지도 않은 채 불평만 하는 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다. 여행에서 얻은 좋은 기운을 나의 평범한 하루에 온전히 녹여내는 것. 그 방법을 터득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내가 여행을 가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비싼 호텔에서 비싼 조식을 먹고 편하게 안내받으며 명품 가방을 사 오는 그런 여행보다도(물론 기회가 된다면 무척 하고 싶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물어가며 발걸음을 옮기는 여행. 형용하기 어려운 이 참맛을 알아가는 과정이야말로 혼자 여행이요, 새로운 여행 감각을 키워내는 즐거운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상에서 느낀 요즘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블제이 스튜디오 https://blog.naver.com/kk646

프리랜서의 일상 @yeonbly_iam




다음주는 도쿄에서 발행을 하겠네요. 두근거리는 마음 안고 잘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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