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를 하려고 잡동사니들을 정리하던 중에 5년 전에 쓰다 만 일기장을 발견했다.
스물여섯 살의 내가 적은 그때의 기록을 읽어 보니 죽고 싶다는 말만 쓰지 않았을 뿐,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노라고 적혀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사의 언행, 차별적인 태도, 사회생활에 대한 고뇌, 도전을 향한 고민, 새로운 만남을 위한 노력, 그러나 허무함과 상실감만 돌려받는 나날들. 여기에 국가적 재난이 주는 슬픔까지, 친절하지 않은 세상과 불만족스러운 상황에 지쳐 쓰러진 내가 간신히 펜을 들고 꾹꾹 눌러 적은 흔적이 가득했다. 새삼 일기를 읽고 놀랐다. 간혹 사람들에게 '내게 있어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2014년'이라고 얘기하곤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힘든 기억도 미화된다는 말처럼 그때가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견딜 만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그저 죽지 못해 살고 먹어야 해서 버는 삶에 찌들어 있었다.
9월 28일
짜증이 나서 눈물이 나고 속상해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내가 뭘 잘못했지, 왜 난 안 됐지? 나도 잘되고 싶었는데.
나도 오랜 시간 힘들게 견뎌서 그만큼 보상받고 싶어했던 게 대체 뭐가 나빴던 거지.
10월 18일
내가 자기계발서를 좋아하는 건 아마 이런 이유에서인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되기 싫고, 그런 사람들과 안 만나고 싶고, 또 그런 사람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받고 싶으니까.
10월 26일
그래, 선택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뒤에 기다리는 책임이 두렵다.
그리고 내 선택으로 사라지게 될 사회 속에서의 내 위치를 잃는 게 겁이 난다.
...
이 일이 내게 주는 사회적 안정감만큼 선택이 힘들고 무섭다.
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걸까.
11월 21일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싶다.
...
돈에 매달리는 삶.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돈 걱정 않으며 펑펑 쓰는 삶도 부럽고
그만한 돈이 없어도 내 마음의 평화에 행복해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도 부럽다.
뭐가 여유 있는 삶일까. 궁금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업을 마치고 나왔는데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제주도를 향해 가던 이웃 학교가 탄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에 학생은 물론이고 교사들도 혼돈에 빠졌다. 이후 거리에선 음악 소리는 물론 웃음소리도 거의 흘러나오지 않았다. 어두운 뉴스 화면 속 상단 한쪽엔 실종과 사망자 수를 나타내는 배너가 표시되어 있었고, 언젠가부터 실종자보다 사망자의 숫자가 계속해서 높아졌다. 선생님들은 감정을 더더욱 드러낼 수 없었다. 동료의 사망 소식을 들은 어느 선생님은 아이들 모르게 교사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면서 울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뒤 소식을 들었는데 수업은 들어가야겠고 애들 앞에서 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가끔 한쪽에 마련된 휴게 공간에서 우리끼리 울다가 토닥였다. 나는 숨죽여 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안다. 이건 정치적 색깔을 나타내는 수단이 아니라 내 친구의 슬픔이자 내 가족의 절망이다.
그리고 4개월 뒤, 거의 4년 동안 장거리 연애 중이었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어린 나이였지만 오랜 장거리 관계에 지쳐 있었기에 확실한 안정감을 갈망했다. 한국에서 새로운 직종에 도전할지, 그것도 아니면 미국에서의 새 삶을 위한 직업 여건을 갖추어야 할지, 내 선택에 도움이 될 만한 결정이 필요했다. 지금 돌아보면 참 어린 나이였지만 진지했고, 진심이었다. 그렇게 결혼을 원했던 내게 돌아온 건 부담스럽고 아직은 자신이 없다는 대답과 네가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바꾸지 못하겠다는 날카로운 한 마디였다. 괜찮은 척 행복을 빌어 주었지만 일기 속에 비친 나는 그를 무척 그리워했다. 진짜 내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그를, 나는 정말로 보고 싶어 했다.
그해 가을, 우리 반 아이가 죽었다. 공부도 잘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친구들과 잘 어울리던 아이였는데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채 휴학 대신 온라인으로 수업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진행하기로 했다. 항암 치료를 앞둔 아이의 순진한 얼굴에선 도리어 강인함이 느껴졌다. 며칠 뒤 헌혈증을 모아 줄 수 있겠냐는 할머님의 연락이 왔다. 여기저기 연락을 취해 헌혈증을 모은 지 12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애가 죽었으니 모으실 필요 없다고.
무서웠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한 명 사라졌다. 더 무서운 사실은 시간이 갈수록 원래 그녀는 없었다고 기억을 바꿔치기하듯 생각하고 있는 내 자신이었다. 장례를 마치고 신경 써 주신 학교 선생님들께 고맙다며 아버님이 비타 오백 한 박스를 사 오셨다. 100명이 넘는 전 직원이 한 병씩 마셔도 될 정도의 양이었다. 그런 아버님께 나는 아이 유품을 건넸다. 사물함에서 나온 아이 체육복부터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문제집과 교과서를 드렸다. 아버님이 감사하다고 했다. 떠나는 뒷모습을 배웅한 뒤 텅 빈 교무실에서 목놓아 울었다. 나는 내가 무슨 고마운 일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가끔 고등학생 때로, 대학생 때로, 그리고 이십 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듣는다.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하며 실없이 건네는―누군가에게는 진심일지도 모르겠지만―말이란 걸 잘 알지만 나는 싫다.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때의 열정과 순수함을 다시금 배우고 싶기는 해도 아픈 기억이 즐거웠던 기억을 몽땅 덮어버릴 정도로 괴로웠던 그 시기를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을까. 아, 시간을 되돌려 스물여섯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토닥여주고 싶기는 하다. 그때 자주 사 먹던 연어 초밥을 사주며 위로하거나 아무도 없는 거실에 앉아 TV 속 화면만 보고 있는 내 어깨를 감싸 안아주고 싶다. 그냥 두 손 꼭 잡고 기도를 해주고도 싶다. 나의 아픔의 크기만큼 행복한 마음이 계속해서 자라나도록 도와달라고 말이다. 굳은살 없는 깨끗한 손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굳은살과 같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해결책일 터. 완전한 어른이 되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분명 그때의 아픔과 마음 앓이는 지금의 내가 좀 더 단단하게 서 있을 수 있도록 나를 빚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겪는 성장통은 이후의 나를 더 아름답게 빚어주겠지.
아팠던 그때를 추억하며 일기장을 덮었다. 그래서, 이걸 버릴까, 말까.
일상에서 느낀 요즘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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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의 일상 @yeonbly_iam
저서 <런던에서 보낸 일주일> http://www.yes24.com/Product/Goods/75235405?Acode=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