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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Jul 19. 2019

아홉 번째 이사

안락한 공간을 또 다시 벗어나는 일에 대하여

아홉 번째 이사를 한다. 떠올릴 수 있는 어릴 때의 기억을 모조리 끌어모아 세어 본다면 아홉 번이 맞을 것이다. 약 3.5년에 한 번씩 다닌 셈인데, 이사를 꽤 자주 하는 편인 것 같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초등학생 때는 잦은 이사 때문에 거쳐 간 학교만 세 군데가 된다. 성격도 성격이지만 어디에 내어놓아도 나름 빠르게 적응할 줄 아는 넉살은 이사를 하면서 단련된 것이 아닐까 싶다. 위화감이 익숙함으로 변해가는 시기의 스트레스는 누구에게나 힘들지만 시간을 따라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무의식적으로 체득했었던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부모님 덕분에 조금 더 넓은 곳으로 이사를 왔다. 흔히 신도시라 불리는 곳이었는데 아직 정착되지 않은 것들이 많아 꽤 불편했지만 새 아파트가 선사하는 깔끔한 공간과 탁 트인 창문 밖 풍경은 모든 걸 잊게 했다. 완벽한 오션 뷰는 아니더라도 저 멀리 타오르는 노을을 집 안에서 바라볼 수 있었고, 어쩌다 이른 오후에 집에 들어오면 인테리어 잡지 화보처럼 햇살 가득한 복도와 거실 풍경이 펼쳐졌다. 딱 그 순간에, 그리고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라 현관에서 신발을 벗지도 않고 사진부터 찍어대곤 했고, 소셜미디어에 자랑할 만한 사진을 업로드한 후, 만족스럽게 식탁에 앉아 밀크티 한 잔을 마시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특히 내 방은 프리랜서로서의 성장을 함께한 곳이라 유난히 애착이 크다. 떨리는 마음으로 넣은 이력서가 빛을 발하지 못했을 때나 막연한 미래를 걱정하며 불 꺼진 새벽 풍경을 바라볼 때나, 나는 늘 그곳에 있었다. 프리랜서를 한다더니 잘하고 있는 건지 불안하다는 부모님끼리의 속삭이는 대화를 듣고 소리 없이 눈물만 삼키던 그 공간에서 처음으로 작업 의뢰를 받았고, 거래처를 늘렸고, 책 원고를 썼다. 꿈꾸는 공간이자 지친 나를 위로하고 번역가로서 한 걸음을 딛게 해준 내 작업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의 빠른 손길로 순식간에 비워진 작업실을 바라보니 눈시울이 붉어진다. 손때가 남아 있는 정든 공간이 온전하게 비워졌을 때 사람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작은 가방에 중요한 소지품 몇 개 챙겨 든 채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마주한 내가 왜인지 처량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물건이 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진짜 네 것은 그것들뿐이란 사실을 똑똑히 보아두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쉬움에 자꾸만 주춤거리는 내게 고생했다는 무언의 한마디를 끝으로 눈길조차 건네지 않는 것 같아 혼란스럽다. 나는 아직 새로운 곳에 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어서 가라고 차갑게 내치는 것만 같아서, 서글프다.



조금 더 작아진 새집엔 지금보다 수납공간이 부족해 다양한 잡동사니들이 거실에 나앉게 된다. 발굴 작업을 통해 사은품으로 받아둔 가방부터 화장품 등을 SNS에 올려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있자니 미래를 향한 나의 불안한 심리가 공간에까지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일단 붙잡아두고 보자는 식이었겠지. 지금까지 그 작고 아담한 공간을 무엇으로 채워 넣으려 했던 걸까. 그냥 쓸쓸해 보이는 게 싫었던 건 아닐까, 싶더라. 조금 비워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텐데.



새 공간에 정이 들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태어나서 10층 이상으로 높은 곳에 살아 보는 건 처음이라 색다른 도시적 풍경에 감탄 중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집에 들어왔을 때 주로 왼편에 있던 것들을 오른편에서 찾아야 하고, 개 한 번 키워 본 적 없는 내가 새벽까지 짖어대는 아랫집 강아지와 동고동락해야 해서 이곳과 친숙해지기까지는 조금 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다. 그래, 아픈 시간 만큼 기쁜 시간도 함께했던 공간아, 고마웠다. 나는 새곳에서도 즐거운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갈 것이야. 여기서 책도 한 권 더 내고 번역료도 조금 더 올리고 좋은 거래처도 한 곳 더 찾을 수 있다면 기쁠 테고, 또 이끌리듯 따라 이사를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로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는 그날이 온다면 행복하겠다. 그때 붉어질 눈시울은 새 공간을 향한 낯선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과 행복의 눈물이 될 것이라고, 믿음 부족한 한마디를 허세 가득 담아 허공에 외치니 속이 살짝 시원해진다.



일상에서 느낀 요즘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블제이 스튜디오 https://blog.naver.com/kk646

프리랜서의 일상 @yeonbly_iam

저서 <런던에서 보낸 일주일> http://www.yes24.com/Product/Goods/75235405?Acode=101


새집의 전망도 무척 멋집니다. 그래서 집에 있고 싶은데, 치울 것들이 눈에 밟혀 카페로 도망 나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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