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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Aug 16. 2019

오늘은 감사 일기를 써 보세요

3년 전 이맘때 감사 일기를 써 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매일 최소 세 개씩 적되, 스마트폰 메모장을 활용하든 직접 손으로 노트에 쓰든 그 방식에는 제한이 없다. 단 일요일은 감사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그는 하루만큼은 쓰지 않기를 권했는데 그 이유인즉슨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억지로 감사 제목을 찾아내기 위한 행동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고도 말했다. 일요일에는 그간 적었던 감사의 내용을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설명이 일리가 있다고 느껴져 그 방식을 일주일간 따랐다.



나는 스마트폰 메모장을 활용했는데, 그동안 휴대폰을 두어 번 바꾸면서 3년 전에 작성했던 감사 일기는 사라지고 없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때 감사했던 내용은 아무 일 없이 잠을 자고 눈을 뜬 것, 출근 버스를 놓치지 않은 것, 유럽 여행 비용에 보탬이 될 만한 약간의 돈이 생긴 것 등 크게 대단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아주 작고 사소한 수많은 것들이 나의 하루를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자 그것에 겸손히 고개 숙일 수 있는 시간이 바로 감사 일기를 적는 순간이었다. 오프라 윈프리의 강력한 한마디로 한때 감사 일기 열풍이 불었던 기억이 난다. 감사 일기가 지닌 힘을 설명한 그녀의 강연 영상이 수많은 조회 수를 기록했고 감사 일기를 적고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설파하는 자기계발서가 줄지어 출간되었고, 이를 본 작가 꿈나무들은 뒤질세라 블로그에 매일같이 감사 제목을 적어 업로드했다. 마치 신세계를 발견한 것처럼, 그 신세계에 너도나도 아파트 하나 분양받으려 몰려든 입주 박람회의 분주함 같았다.



사실 감사 일기의 핵심은 쓰는 것이 아니라 감사 일기 없이 살아가는 삶에 있다. 감사 일기를 통해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시작―또는 마무리―하고 불만족스러운 듯한 나의 상황을 차분하게 받아들이며 주어진 분수에 만족하는 것. 그리고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행위를 초월하여 일상 자체에 감사가 흘러넘치는 삶을 사는 것이 감사 일기의 핵심일 터. 하지만 가끔은 '감사'라는 말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곤 한다. 이 꼴은 내가 바라던 그 꼴이 아닌데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고, 그녀의 저 꼴은 아무리 봐도 좋은 꼴이 아닌데 뭘 감사하다고 말하는 건지 답답하고 복장이 터진다. 세상을 바꿀 만한 능력이 없다면 바뀌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래서 감사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냐며 거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물밀 듯이 감사 일기를 적어대던 그 사람들의 감사 일기는 지금, 어디 있나면서.



어제는 약 두 달 만에 에어컨 없이 선풍기만 틀고 잠을 잤다. 선선한 새벽바람이 불어오는 것에 함박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동시에 곧 가을이 찾아오고 한 해가 마무리될 것이라는 생각에 우울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후텁지근한 공기를 가르는 서늘한 바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더라. 요새 일을 쉬는 엄마는 세 식구밖에 안 되는 가족이 함께 끼니 챙겨 먹는 게 뭐 이리 힘드냐며 지쳤다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좋다. 엄마랑 오늘 하루 더 같이 살아서 좋다. 엄마가 옆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때를 떠올리면 지친 엄마라도 하루 더 살아줘서 고맙다. 작년 이 때 프리랜서로서 처음 일을 시작하며 불안한 미래에 괴로워했다. 괴로운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과거의 나는 내가 지금까지도 프리랜서로 버티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는 낮은 두 자릿수 벌어 살았는데 지금은 낮은 세 자릿수 번다. 자릿수가 하나 늘 때까지 버틴 내가 고맙다. 이런, 조금 더 불평하고 싶었는데 생각을 따라 걷다 보니 감사 제목이 어느새 세 개가 채워진다. 술 한 잔을 꼭 마셔야 하루가 마무리되는 우리 아빠는 백숙이 올라온 식탁을 보며 구시렁하던 어제와 달리 '캬, 그래 이게 행복 아니겠냐'며 웃는다. 눈빛으로 짧은 대화를 마친 엄마와 나도 피식 웃었다.



그래, 결국 감사로 돌아가는구나. 그것이 오늘이고, 내일이고, 그리고 삶일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느낀 요즘의 생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블제이 스튜디오 https://blog.naver.com/kk646

프리랜서의 일상 @yeonbly_iam

저서 <런던에서 보낸 일주일> http://www.yes24.com/Product/Goods/75235405?Acode=101


커피가 필요한 순간 커피를 건네 받았을 때, 내가 느낀 일상의 감정이 누군가에게 읽혔을 때. 무척 감사하더군요 :)

Side note:

3일 연속 갑자기 일이 몰아쳐 잠을 잘 못잤어요. 그래도 일이 있는 게 어디냐며 감사하자고 생각했는데, 정말 감사하는 게 아니라 지금을 잘 넘기기 위한 임시방편처럼 느껴져서 문득 감사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그렇다고 저절로 감사가 되지 않는 순간에 감사하라고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싶진 않습니다.


저의 감사의 순간들입니다.

1번은 커피가 필요한 순간 커피를 건네 받았을 때. 이어진 새벽 마감으로 지쳐 있던 걸 어떻게 아시고. 헤헤.

리드랑 홀더가 너무 예뻐서 사진 남기려고 컵을 들어 올렸는데 '음? 뒷배경이랑 잘 어울리네?'


2번은 내가 느낀 일상의 감정이 누군가에게 읽혔을 때. 감사하게도 오랜만에 다음 메인에 노출되어 많은 분들이 글을 찾아 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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