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 가던 길을 멈추고 가방을 모래바닥에 내팽개친 채 놀이터에서 신나게 빙빙이를 타다가 다시금 집으로 향한다. 우리 집은 1층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으니 은밀하게 열쇠를 꺼내어 신속하게 문을 연 뒤 빠르게 들어가 철컥 잠가야 한다. 당시 우리 집 열쇠는 주로 내 목에 걸려 있었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은 저녁에나 오시기 때문에 알아서 문을 따고 들어가 텔레비전을 보며 저녁밥을 챙겨 먹고 있다 보면, 엄마가 먼저 돌아왔다. 정말 밥을 딱 절반 정도 먹고 있을 즈음에 엄마가 들어왔다. 그 순간 엄마의 표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알아서 잘 챙겨 먹고 있었구나라는 식의 고마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들어찬 한마디를 건네준 것으로 기억한다. 또래에 비해 편식 없이 이것저것 잘 먹는 편이었던지라 반찬 투정을 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간혹 그것을 철들었다고 표현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따끈한 쌀밥에 짭조름한 멸치 볶음을 넣고 김 가루를 살짝 뿌린 뒤, 작은 공 모양으로 뭉쳐진 밥을 그때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주먹밥'이라 불렀다. 우리 엄마 손은 요술 손. 이것과 저것 한두 개만 넣어 휘적휘적했을 뿐인데 이렇게나 맛있는 음식이 탄생하다니. 가끔은 야구공만 하게 만들어진 주먹밥이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나만의 특식을 먹는다고 즐거워했다.
그중에서도 저녁 식사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반찬은 바로 총각김치였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승연네는 한 통 더 줘야 된다면서, 짐을 다 싣고 떠난 친척들 몰래 다가와 빨리 저것을 가져다 실으라며 은밀한 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나의 총각김치 사랑은 대단했다. 그런 할머니의 사랑이 듬뿍 담긴 총각김치는 손녀의 기를 살려 주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집에 왔는데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거나 엄마가 깜빡해서 무언가를 만들어 놓고 가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못 먹거나 하고 있지 말고 씩씩하게 밥에 찬물을 말아 총각김치라도 먹고 있으라 엄마는 당부했다. 가장 입맛 없을 때, 그리고 먹을 것이 도저히 없을 때 하는 찬물에 밥 말아 먹기란 내게 씩씩함의 상징이었다.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고, 먹을 것이 없다고, 챙겨 주는 이도 없다며 서글퍼할 새도 없이 자연스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물과 밥은 어린 꼬마의 허기를 달래며 배고픔으로 인한 마음을 차분히 진정시켰다. 여기에 총각김치의 아삭한 식감과 특유의 새콤달콤함이 더해지니 쌀알이 주는 달짝지근한 맛과 상큼한 신맛이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몇 번을 먹어도 맛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볼품없는 혼밥 밥상은 여덟 살 아이가 스스로 차린, 세상에서 가장 독립적인 밥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외동인 내게 유난히 씩씩해지는 방법을 자주 가르쳤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는데 엄마가 학교까지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고 해도 친구들 보란 듯이 신발주머니를 머리에 이고 집에 오면 되는 거라고, 혼자라고 기죽지 말고 알아서 오라고 엄마는 말했다. 어느 비 오는 날, 엄마의 말대로 신발주머니를 이고 집에 왔는데 엄마가 집 안에서 문을 열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분명 엄마는 일부러 나오지 않고 내가 알아서 잘 오는 가를 노심초사하며 기다렸을 것이다. 대견하게 빗물을 털어주는 엄마의 손길을 느끼며 그날 나는 집에서 나를 반겨준 엄마와 함께 최고로 맛있는 저녁을 먹었을 것이다.
씩씩함의 상징이던 엄마가 아팠던 3년 전 그때를 기억한다. 조금 더 정밀한 검사를 해 보면 좋겠다는 진단에 우리 세 식구는 말이 없어졌더랬다. 그리고 그동안 모녀가 주고받는 대화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던가 엄마의 도움 없이도 이것저것 잘 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듯한 뉘앙스가 강하게 풍겼다. 무엇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인지 서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때는 늦어지는 검사 결과를 초조히 기다리면서 병원 밥 대신 맵고 짠 편의점 컵라면에 밥까지 말아 먹으며 둘이서 좋다고 낄낄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불안함 가득한 눈물로 인해 운전을 하기 어려웠고, 엄마는 하늘에서 아주 잠깐 내려 온 천사라는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며 천사 없이 아빠와 둘이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뭐,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천사는 아직도 우리 집에서 산다. 요즘은 살이 쪘다고 덜 먹겠다는 선포까지 한다. 뱃살을 꼬집으면서 천사와 마주보고 깔깔거리는 순간이 나는 좋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늦여름 아침, 냉장고를 열었다가 반찬통에 담긴 총각김치를 보곤 찬물에 밥을 말았다. 밥 한술에 아삭한 총각김치를 입에 넣으며 생각한다. 한 번의 아삭함에 날 사랑해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다른 한 번의 아삭함에 지금까지 잘 버텨온 가족을 향한 대견함을, 나머지 한 번의 아삭함에 불안한 미래에 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아 오늘도 살아내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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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의 일상 @yeonbly_i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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