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재이 Aug 30. 2020

AI가 번역을 하는 시대

번역 노동의 시대가 바뀌고 있다

4월이었다. 지금의 '뉴노멀(New Normal)' 라이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몇 개월 전, 번역 업체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여러 위기 상황에서도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았던 번역 업계마저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보고 있으며, 번역가들 또한 수입 급감을 겪고 있고, 차기 프로젝트에는 이전부터 번역 시장에 도입되었던 MT 적용이 더욱 확산될 것이기에, 번역가들도 MT 작업 수용이 절실하다는 내용이었다. MTPE라, 올게 왔구나. 이메일을 다 읽고 잠시 멍해 있다가 계약서를 뒤져 MTPE 작업 단가가 얼마인지를 확인했다. 이제는 피할 수 없다는 그 말이 비장하게 들렸다. 하지만 5분 뒤 도착 예정이라는 버스를 타려고 최선을 다해 뛰었으나 결국 눈앞에서 놓쳐, 맥 빠진 걸음으로 택시 정류장에 가는 기분이 들었다.


MTPE는 Machine Translation Post Editing의 약자로, 기계가 1차적으로 번역한 결과물을 사람이 고치는 작업을 뜻한다. 지금까지 해 온 원문과 번역문을 토대로 한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사람이 직접 쓴 것처럼 그럴듯한 작업물을 내놓기에 업계에는 번역 단가 절감 효과를 주고 전문 번역가에게는 시간과 힘을 절약해 주는 '하이브리드'의 형태라 말하기도 한다. 글쎄, AI와 사람이 힘을 합치는 이상적인 프로젝트로 보이지만 로봇이 어질러놓은 방구석을 치우는 기분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원문에 있는 단어를 빠뜨리진 않았는지, 원칙과 달리 내부 통일하기로 한 단어―트라우저(trousers)는 팬츠(pants)로 쓴다던가―를 잘못 쓰진 않았는지, 띄어쓰기를 잘못 하진 않았는지를 일일이 다 확인해야 하는 데다, 때론 일부 번역문 특성상 온점을 찍지 않아도 되는데 원칙을 중요시하는 융통성 없는 매력 덕분에 내가 온점을 하나하나 삭제해야 하기도 했다.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까지 사 가며 눈 부릅뜨고 작업을 했어도 온점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면 담당자님께 이메일이 온다. '정말 잘해 주셨는데 MT 수정이 안 된 곳이 더러 있었어요. 다음 작업 때 유의 부탁드립니다'라고.


흔히 산업 번역 혹은 기술 번역이라 불리는 번역 분야에선 MT가 실 평수를 늘려가는 추세다. 다른 번역에 비해 의역을 지양하고 정확한 규칙과 패턴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야이기에, 앞서 말했듯 이러한 번역의 형태를 데이터로 잘 흡수시켜 두면 사람이 한 번역과 비슷한 문장을 내놓기 때문이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해 보면 작업 경험이 있는 번역가들의 후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그 후기 속엔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는 말과 보람이 없다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번역가들에겐 생계를 위한 별수 없는 선택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진행하는 여러 프로젝트 중에선 이미 작업 두 건에 MT가 적용됐다. 한 번은 이미 습득한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기계가 번역을 잘 진행한 편이어서 일관된 몇 가지 오류를 수정하고 감수 단계로 넘겼는데, 최종 감수자의 피드백이 등록됐다고 해서 확인해 보니 A를 B로 고치는 것이 더 낫겠다는 댓글이 적혀 있었다. 참고로 A는 최종 감수자 본인의 주장으로 지난 몇 년간 일관되게 지켜 온 표현인데, 이 표현이 별로니까 B로 고쳤으면 좋지 않았겠느냐는 말이어서 무척 의아했다.

이 댓글을 읽고 지금껏 데이터를 습득하느라 고생한 AI는 갑자기 표현이 바뀌어 혼란스럽지 않을까 싶었으나 백과사전 수십 권을 삼킬 줄 아는 대식가(大識家)시니 괜찮을 수도 있겠다 치자. 하지만 A가 낫다는 주장을 존중했다가 B로 고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작업은 포스트 에디팅 담당자였던 나의 실수(error)라는 의견을 남기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AI 번역은 정말 인간의 노동을 돕는가? 품질 향상을 돕는가? 나의 노동에는 보람이 포함되어야 하는데 AI와 함께하는 이 작업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번역가인가? 교정 전문가인가? 받아쓰기 채점 요원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사람 번역가는 AI가 잘해 둔 일에 실수를 뿌리는 자가 되는 것인가?


특히 출판 번역이나 통역처럼 인간의 전매특허인 눈치가 필요한 분야에서는 AI가 발을 뻗진 못할 것이다. 텍스트 안에 숨겨진 의미, 풍자, 역설, 비유 등을 들추지 못할 테니까. 몇 년 전 어느 인기 여행 프로그램에 출연한 배우가 외국에서 번역기 앱을 이용해 핫도그 세 개를 주문하려다 '핫도그 월드'란 번역문이 탄생했던 웃픈 일화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아직까지 기계 번역은 사람의 힘을 충분히 빌려야 하지만, 번역 업계에도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학창 시절에 선생님께서 로봇이 소설을 써서 인간이 그걸 읽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직 AI가 소설은 쓰지 않지만, 번역은 하고 있다. 종이 번역서 한 권 내보기를 희망하는 병아리 번역가는 이 선생님의 예언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 AI번역은 정말 사람 번역가와 힘을 합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시대는 탄생할 수 있을까. 요즘은 AI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번역가의 틀림을 증명하려는 사람들이 느는 추세라, 의역을 하면서도 구구절절 설명할 거리를 준비해 둬야 한다. AI가 사람의 번역문을 깎아내리는 데 쓰이는 게 아니라 함께 윈윈 하는 시스템 구축의 길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번역을 업으로 먹고살기를 희망하는 사람이자 어떤 한국어 표현이 제일 적합할지 고민하는 순간을 좋아하고 그 순간이 모여 하나의 글이 탄생했을 때 뿌듯함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언어를 향한 사람 번역가의 고뇌와 섬세함과 노력이 빛을 잃지 않는, 새 번역 노동 시대를 꿈꿔 본다.




*'핫도그 세 개 주세요'를 'Please, Hot dog world'로 번역했던 번역기 앱 덕분에 통쾌하게 웃어젖혔던 기억이 난다. 개수를 뜻하는 '세 개'를 '세계'로 알아들은 거다. 거 봐, 아직 기계는 사람 번역을 못 이긴다니까 라며 우쭐한 기분까지 느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리랜서의 휴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