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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Sep 11. 2020

번역은 체력

번역가가 되려면

번역은 체력이다. 어떤 일을 하려면 그에 맞는 수행 능력과 힘이 필요하듯, 번역을 하려면 이에 적합한 수행 능력과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근육을 키워야 할 텐데, 이 근육에는 원하지 않아도 오랜 시간을 앉아 있게 도와주는 엉덩이 근육과 허리 근육이 포함된다. 화가 많아서인지, 모니터 앞에 앉으면 자꾸만 쳐들어 지는 고개 때문에 고생하는 턱 근육과 목 근육,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가는 어깨 근육, 키보드 두들기느라 지친 손가락 근육, 수시로 꼬는 왼쪽 다리를 지탱할 오른쪽 발목 근육도 번역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번역은 체력'이란 말이 신체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10주간 수강한 번역 세미나 수업이 끝났다. 나는 어떤 번역자인가를 고민해 볼 수 있는 뜻깊고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예습과 복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조금 더 시간을 내어 내 글을 다듬지 않은 것, 바쁘다는 이유로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더불어 갈수록 출석하는 수강생 수가 적어져 아쉬웠다. 수업 횟수 절반이 넘으면 수강료도 환불하나 마나일 터이니 초반에 하차한 사람을 제외하고 중반 이후부터 모습을 감춘 사람들은 제대로 출석을 안 했다고 볼 수 있다(여기서 각자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건 별개의 이야기로 둔다). 초반의 열기는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사그라들기 쉽고, 이러한 사그라짐은 마라톤을 이어가려는 사람에겐 치명적이다. 강사도 아닌 내가 수업에 안 왔다고 나무랄 순 없는 일이고 또 그러겠다 말하는 것도 아니지만,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에 준하는 열정 불꽃을 은은히 피워나갈 수 있어야 한다. 문장력도 번역 실력도 하루아침에 늘지 않고 번역 표현에 관한 심오한 토론이 당장에 쓸데없어 보이는 데다 지금의 불만족스러운 하루를 당장 바꿔 주지 않아 재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내겐 목표가 있다고, 이런 장기 레이스에 지지 않을 거라고, 꾸역꾸역 몸을 움직여 강의실에 나와 소망이 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면 어떨까, 마지막 수업 날 생각했다. 번역을 하려면 열정의 체력이 필요하다.



사람인지라 번역하다 실수할 때가 있다. 실수했다는 사실을 타인이 발견할 때도 있고 스스로 발견할 때도 있다. 다시 말해 타인이 내 부끄러움을 들출 수도 있고 혹은 스스로 심판의 굴로 들어갈 때도 있다. 여기서 정신줄을 잘 붙잡지 않으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공부한 게 몇 년인데, 경력이 몇 년인데, 유튜브 속 꼬마는 7살이라더니 무슨 영어를 이렇게 잘해, 나는 밥 먹을 자격이 없어 등등... 실수는 줄여나가면 된다. 줄여지지 않거든 잠시 멈춰 서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고 대처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전력 질주를 하려는데 달리는 게 힘들다면 신발 끈이 풀어졌는지 발목이 아픈 건지를 확인하고 그에 맞는 신속한 조치를 취한 뒤 뛰어야 기권이 아닌 5등이라도 하지 않을까. 실수에 늘 관대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능숙한 대처법을 마련할 필요는 있다. 실수 모음집을 만들어 두고 오래오래 기억한달지 한 번에 마카롱 3개를 먹고 정신을 차린 달지 스쿼트 100개로 사죄한달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실수를 안 하면 좋겠지만 별수 있나. 혹은 글을 쓰고 먹고사는 삶에 지쳐 번역료와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게 되는 때도 있다. 손 하나 까딱하면 몇백은 벌 줄 알았는데 이거 번역하고 3만 원이라니. 세수도 못 하고 떡진 머리로 내가 몇 시간을 고생했는데. 난 3만 원짜리 인간이야! 흑흑. 매일 이러고 살 순 없지 않나. 번역을 하려면 정신의 체력이 필요하다.



언제나 원하는 내용만 골라 번역하며 살 순 없기에 잡다한 지식력이 있으면 도움이 된다. 많은 번역가 대선배들이 '지금' 많이 읽고, 보고, 쓰라고 조언한다. 예를 들어 패션과 관련한 내용을 번역하다가도 갑자기 디자이너가 튀어나와 미국 서부 시대에서 영감을 받았다며 골드러시에 대해 설명한다면 그게 대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매끄럽게 번역할 수 있다. 위키백과에 쓰인 설명을 눈으로만 훑은 사람과 10분 정도 시간을 내어 정독한 사람과 세계사 책을 읽은 적이 있어 아는 내용을 한 번 더 검색하는 사람의 이해도는 천차만별이다. 그러면 당연히 번역문의 깊이도 달라진다. 독자를 위해 보충 설명을 어디까지 넣을지를 직접 선택할 수 있게 되니까. '스타일리시하면서도 강인하고 러기드한 무드와 빈티지한 매력을 동시에 불어넣은 와일드 웨스트(Wild West) 룩을 떠올리게 한다.' 으아, 취한다 취해, 번역가가 말한다. 음, 그래서 와일드 웨스트 룩이 뭐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번역문도 결국 글이고, 글은 소통을 전제로 하는데, 나 홀로 내 멋에 취하니 겉보기엔 화려해도 알맹이 없는 글이 완성된다. 원문이 어떤지는 별개의 문제다. 정보를 수집하고 모르는 내용은 바짝 쫓자. 번역을 하려면 정보 추격의 체력이 필요하다.



다시 돌아가서, 번역은 체력이다. 다양한 능력과 힘을 고루 갖추어야 한다. 고루 갖추는 힘은 건강한 신체에서 나온다. 조금만 시간을 내어 팔 굽혀 펴기를 하고 단백질을 챙겨 먹고 홍삼 스틱도 먹고 산책도 하고 햇볕을 쐬면서 몸을 가꿔 주자. 그렇지 않으면 열정도, 정신도, 정보 추격 능력도 다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잊지 말자. 체력을 키우는 동안 버티는 힘과 인내심도 같이 자라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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