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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이 Sep 21. 2020

번역은 추격

번역자에게 필요한 태도란

잊을  없는 실수담이 있다. 번역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특정 패션 브랜드에 관한 칼럼이었는데 첫 번째 문단에 들어서자마자 브랜드 디자이너의 이름과 출신 지역이 언급됐다. 읽어 보니 그 사람은 '조지아'에서 태어났다고 적혀 있었다. 아하, 미국 조지아주에서 태어나셨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번역을 이어나갔다. 감수 단계로 원고를 넘긴 뒤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가 그 다음 주 월요일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 디자이너는 미국 조지아가 아니라 나라 조지아―러시아식으론 그루지야라고 발음한다―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감수자도 그 부분을 면밀히 보지 못했던 것 같고, 최종 담당자인 본인도 보지 못했으니 우리에겐 연대 책임이 있지만, 고객사에서 살짝 날렵한 피드백을 보내왔으니 다음 작업에선 유념해 주셔야겠다고 말이다. 그날, 얼굴이 보이지 않는 수화기 너머로 아이고 죄송합니다를 여러 번 외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브랜드 베트멍을 이끌었던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는 러시아 아래에 위치한 '조지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것을 안다고 믿으면 안 된다. 번역을 할 땐 이 역설이 성립된다. 그래야만 옳은 정보를 추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단어가 나올 때보다 아는 단어로만 이루어진 간단한 문장을 번역할 때 실수할 가능성이 크다. 안다고 생각해서 그 속에 담긴 뉘앙스를 더 세심히 관찰하지 않거나 사전 속 6번째에 해당하는 의미를 찾아보지 않아 낭패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내용이 나왔을 때도 조금 더 집요한 검색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 번역 스터디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예비 번역자 대부분이 끈질긴 추격을 하지 않았음이 여실히 드러난 적이 있었다. 우리의 스터디 대상이었던 영어 소설에서 작가가 그냥 '신데렐라'라고 말하면 될 걸 굳이 '유리구두를 신은 아가씨'라고 풀어 표현하는 바람에 대체 이게 무슨 고전 이야기를 뜻하는 것인지 일일이 검색을 해야 했다. 그중 한 대목이 가장 까다로웠는데, 자리에 모인 스터디원 대부분이 이 대목에 해당하는 본인의 번역문을 낭독하면서 목소리에 물음표를 실었다. 평서문을 의문문처럼 읽는다는 건 원문에 쓰여 있으니 옮기긴 했으나 스스로도 이게 뭘 뜻하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끝까지 추격한 자의 목소리는 달랐다. 차분히 낭독에 마침표를 찍으며 본인이 이렇게 번역한 근거와 근거를 찾아낸 검색 과정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였다. 아쉽게도 이 의견은 실제 번역본과 일치하진 않았지만, 목소리의 높낮이는 물론 문장의 매끄러움에 관해서는 차이를 드러냈다. 추격한 자는 어깨를 펼 수 있었고 뒤쫓지 않은 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조용히 노트 필기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독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옮긴이에게는 원문에 적힌 내용을 추적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토대로 글의 사정에 맞게 트랜스크리에이팅을 해야 한다. 이 이야기가 샤를 페로의 <엄지 동자>인 건 알겠는데, 이 사실을 그대로 적어 정보의 정확성을 살릴지 아니면 작가 특유의 문체를 따라 거인을 물리친 아이들이라고 써 줄지 고민할 수 있게 된다. 정보를 확인할 때 적당한 키워드로 한두 번 검색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 아이들, 거인, 고전, 이야기, 우화, 어린이 이야기, 샤를 페로, 프랑스 등. 많은 '좋아요'를 받기 위해 이 말 저 말로 이루어진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떠올리 듯 다양한 키워드를 꾸역꾸역 떠올리고 다양하게 조합해 보며 검색하고 또 검색해야 새로운 정보를 발견하고 거기서 또 단서를 얻어 다른 정보를 발견할 수 있다. 글에는 이런 고생과 추격 정신이 반영되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는 옮기는 자의 아쉬움이자 번역문의 숙명이 아닐까.



더불어 맡고 있는 분야가 있다면 관련 내용을 알고자 하는 태도를 갖추어야겠다. 전공자나 석사, 박사만큼 공부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을 것이고 적당히 그때그때에 맞는 검색으로 필요한 내용을 숙지할 수 있지만 꾸준히 해당 분야의 번역을 이어가려면 역시나 추격의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최근 패션과 관련된 책, 비거니즘, 글쓰기, 한국 고전 문학, 인터뷰 모음집을 구매했다. 모르는 내용을 알기 위해, 아는 내용을 매끄럽게 다듬을 요량이다. 집 밖으로 나가기가 꺼려지는 시기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손바닥에 주어진 기계 하나와 책 한 권만 있으면 온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고 모르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번역을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에 대한 대답. 번역은 추격. 번역자는 쫓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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