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치즈 스콘

번역가로서 계약서에 서명한 날

by 정재이

금요일에 반가운 택배가 도착할 예정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이메일을 통해 미리 알고 있었다. 금요일이 다가올수록 택배가 기다려졌고,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택배 받게 된 것을 기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당일 아침,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전날 미리 검색해둔 '크림치즈 스콘 만드는 법'을 휴대폰 화면에 띄웠다. 그리고는 파자마 바람으로 주방에 달려가 부은 얼굴로 계량 저울을 꺼내 레시피를 따라 재료를 계량하기 시작했다. 박력분, 베이킹파우더, 소금, 설탕, 우유, 계란, 무염 버터, 크림치즈까지. 라텍스 장갑을 끼고 버터와 크림치즈를 박력분과 함께 볼에 넣은 뒤 꾹꾹 눌러가며 손으로 다졌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이삿날에는 시루떡 돌린다는데, 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된 어느 금요일 아침, 나는 크림치즈 스콘을 돌릴 예정이었다.


종이 계약서를 쓴 게 처음은 아니라 스콘까지 구워가며 기념하는 것은 조금 새삼스러운 행동이었다. 이날 도장 찍은 계약서는 통산 네 번째 종이 계약서였다. 지금까지는 이메일로 계약서 파일을 받아 항목을 확인한 뒤 직접 프린트해 서명을 하고 다시 스캔하여 보내 주는 것으로 충분했고 몇몇 회사는 이마저도 할 필요가 없었다. 자사 전자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었기에 내가 할 일은 ID를 부여받아 합의한 내용이 시스템에 잘 적용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이 사항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컨펌'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됐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번 계약서는 조금 더 전통적인 방식으로 체결했기에 기분이 색달랐던 걸지도 모르겠다. 슬리퍼 차림으로 달려 나가 무인 택배함에서 꺼내 온 계약서 2부를 나란히 두고 맞닿은 부분에 도장이 절반씩 걸치도록 꾹, 양손을 사용해 한 장씩 동시에 뒤로 넘겨가며 반 접힌 부분에 또다시 도장 절반이 걸치도록 꾹, 마지막으로 틀린 부분이나 이해하지 못한 내용은 없는지 자세히 살피다 내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에 다시 한 번 도장을 꾹 찍었다. 집중하느라 미간은 찌푸려져 있었지만 마음은 기분 좋게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누가 보면 로또 수령금 확인하는 줄 알았을지도.


P20200927_155331880_64EBD19E-25F1-414E-9887-16A629735511.JPG


첫 번째 계약서도 아니고 네 번째 계약서를 새삼스레 축하하고 싶었던 이유는... 글쎄,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높은 단가로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려나, 생각지도 못한 대기업에서 먼저 제의를 해줬기 때문이려나, 아니면 한 해가 가기 전 뭐라도 해냈다는 기분이 들어서려나. SNS를 뺀 브랜딩은 생각할 수도 없는 시대라지만 나는 SNS로 업무 제의받기를 경계했던 사람이기에 신기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번 계약서는 블로그에 업로드해 두었던 패션 용어 관련 포스팅을 보고 이탈리아 브랜드의 한국 본사 직원이 직접 연락을 해 인연을 맺은 경우이기 때문이다. 유명 패션 브랜드의 담당자가 연락해 오는 일이 내게 일어나다니. 뭐랄까, 나에겐 그런 믿음이 있다. 나에겐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 운명처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해하는 사람을 보며 나에겐 저런 일이 없겠지, 운명처럼 어느 날 쓴 글이 편집자의 눈에 띄어 단숨에 대세로 등극한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에겐 저런 일이 없겠지, 운명처럼 어쩌다 시작한 사업이 번창하여 부자가 된 유명인의 얼굴을 보며 나에겐 저런 일이 없겠지라고 다짐한다. 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외쳤던, 조금 더 어렸던 날의 열정이 비관으로 바뀌는 걸 보며 나 자신도 씁쓸하지만, 기대가 주는 실망감이 얼마나 큰지를 이제는 알기에 썩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구곤 한다.


더욱이 내가 패션 번역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 이 고유의 번역 문체를 담당할 줄 아는 전문가라고 불리게 되어 뭐라도 된 것 같아 기뻤다. 그래서 기분을 내고 싶었나 보다. 휴지시킨 반죽 위에 우유 물을 조심스럽게 발라주고 오븐에 넣었다. 주방에서 시작해 거실을 메우는 따뜻한 공기가 부정적인 심지(心志)를 녹인다. 더디어도 이끌리는 대로 가는 그곳에 내 길이 있지 않을까, 꿈꾸는 다른 일들도 이렇게 풀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하면서. 25분 뒤, 겉은 바삭하고 속은 폭신한 스콘이 밖으로 나왔다. 투박한 듯 거친 모양새이지만 이 스콘에는 설렘과 기쁨과 희망이 담겨 있다. 이 계약서를 체결하기 위해 이메일을 주고받는 일부터 일정 조율, 항목 의논, 최종 확인 등의 과정 속에서 설렘과 초조함을 경험했던 지난 날의 마음 고생도 레시피 한구석을 차지했다. 패션 번역이 내 전문 분야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면, 그럴 수 있고 또 이미 그렇게 되었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낸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증거물로 이 크림치즈 스콘이 탄생했고.


이왕이면 갓 구운 빵이니 서둘러 나눠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생각을 멈추고 스콘을 식힘망에 잠시 올려둔 뒤 포장용 비닐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내 기분이 좋아 내 멋대로 구운 것을 먹으라고 나누어 주는 일이니 왠지 미안하기도 했지만 잠시 억지를 부리기로 하고, 근처에 있는 친한 프리랜서의 사무실에 한 봉지를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삿날에는 시루떡 돌리듯, 내가 계약서 쓴 날엔 스콘을 돌릴 테니 스콘 먹는 날이 많아지기를 기도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