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맛을 내려면 열병도 필요하다
대뜸 저녁에 요리하는 것이 재밌다. 끼니를 해결하려 식사 시간에 요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일과를 마무리하는 오후 10시나 11시쯤 리코타 치즈를 만든다거나 빵을 굽는다거나. 뭐, 그런 생뚱맞은 요리가 즐겁다. 일이 많은 날에는 해선 안 될 행동이고 가족이 모두 잠을 청한 경우에는 할 수도 없는 행동이지만 나는 이러한 돌발 행동에 꽤 재미를 붙였다. 밤 11시가 넘었는데도 TV 소리가 들리고 거실 불빛이 환해서 주방에서 사부작거려도 티가 덜 난다거나 눈앞의 닥친 번역문과 인생이 풀리지 않는 것 같을 때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한다. 이날은 주방에 간 이유는 후자에 속했고 요리 목표물은 사과였다.
즐겨 마시는 홍차 중에 애플 시나몬 홍차가 있다.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던 9월 초순 어느 날, 유난히 홍차가 향긋하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이 매력적인 사과와 계피의 조합을 마다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맛에 취해 스마트폰을 들고 친구에게 이 홍차는 네가 빨리 영접해야 할 요물이라고 메시지를 보냈으나 이것만으로는 뭔가 개운치 않아서 곰곰이 생각하다 직접 시나몬 가루를 넣은 사과잼을 만들어야겠다 싶었다. 나에게 사과잼이란 애플 시나몬 홍차가 준 영감이었다. 그래, 가을 하면 사과, 사과하면 사과잼, 사과잼 하면 계피가 빠질 수 없으니까! 그 자리에서 레시피를 검색해 바로 만드려다가 집에 계핏가루가 없단 걸 깨닫고 자중하자는 의미로 모니터 앞에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이 계절 끝나기 전에는 꼭 만들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갑자기 사과잼을 만들겠다며 주방으로 향했던 이유는 가을이 주는 고독함에 사무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을을 많이 탄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무더운 여름 공기에 짓눌려 살다가 갑자기 불어온 선선한 아침 바람맞으며 잠을 깨는 순간 계절이 바뀌었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분주해진다. 가을이 왔다는 것은 겨울이 머지않았다는 뜻이고 이건 한 해가 끝나간단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흐르는데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려오느라 정작 소중한 것을 놓쳤던 건 아닐까, 나이가 든다는 건 뭘까,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는 걸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살 속을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에 쓸쓸해져 속이 문드러질 것 같던 10월 중순의 어느 날, 마트에 들어가 계핏가루를 집어 들고 집으로 향했다. 하루 일과에 지쳐 몸은 노곤했지만 냉장고 야채실에서 잘 익은 사과 네 개를 꺼냈다. '그래도 해놓고 자면 내일 맛있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좀 피곤해도 지금 만들면 만드는 동안은 아무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사과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사과를 썰고, 그 위에 설탕을 부어 물기가 살짝 생기도록 둔 뒤, 불에 졸이다가 점성이 생기면 레몬즙과 계핏가루 적당량을 넣어 마무리하면 끝이다. 나는 사과 껍질을 잘 벗기지 못하므로 비장하게 감자 칼을 들어 훅훅 빨간 껍질을 벗겨 냈다. 다행히 손으로 직접 깎았을 때보다 반들반들해서 사과에게 염치를 차릴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이 발가벗은 사과를 다진 양파 사이즈로 잘라야 하는데 이 귀찮은 과정이 하이라이트다. 다짐기 같은 거 쓰면 반칙이다. 크기가 일정하지 않을지라도 직접 칼을 써서 길쭉하게 자르고, 그것들을 다시 정갈하게 모아 일정한 크기로 다져내야 재밌는 거다. 나는 1/4 크기로 자른 사과 네 개, 그러니까 총 16개의 사과를 잘게 다져야 했다. 사과 하나, 사과 둘... 어라, 만만치 않네. 세 개쯤 썰었을 때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재빠르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갑자기 한석봉 어머니는 떡을 써는 일을 즐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난한 현실 속 잠시나마 잡념과 근심을 몰아 주는 일이 일정한 두께로 떡을 써는 일이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동그란 사과들이 작은 입자가 되어 웍에 수북히 쌓이는 것을 보며, 복잡미묘한 내 마음속 생각 구슬을 몸 밖으로 다 꺼내 놓은 기분이 들었다. 냉장고 한 구석을 차지하던 커다란 덩어리들인데 쪼개고 쪼개어 놓으니 별거 아니었다. 작디 작았다.
이제 졸여 주겠다. 어감이 이상하지만, 이 작은 구슬들을 뜨끈한 불에 뭉근히 녹여 줄 것이다. 열병처럼 앓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잼으로 변신하겠지. 아직 물기가 많은 사과 더미를 보며 완성된 잼과 커피, 그리고 통밀빵을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 싶어 후다닥 통밀가루를 꺼냈다. 볼에 통밀가루 조금, 소금 조금, 드라이 이스트 조금, 아몬드랑 호두도 조금. 물을 부어 반죽하다 불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사과를 저어 주고 발효를 하다 또다시 불 앞에 달려가기를 여러 번 반복하니 잡념은커녕, 허리랑 다리가 아파 빨리 자고 싶더라. 잼의 달콤한 냄새와 통밀빵의 고소한 향기 때문에 몸이 더 노곤해지기도 했다.
갓 구운 따끈한 빵 위에 잼을 얹어 한 입 크게 먹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빵 표면에 그새 달큰한 시럽이 스며들었고 열심히 다져 넣은 사과가 조근조근 씹혔다. 거실 밖 창문에는 손톱달이 떠 있었다. 그렇게 밖을 바라보다 문득 사과의 하얀 속살 중간중간에 있던 멍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곳에 상처를 품고 있는 모습이 사람과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조금 뜨거운 불 속에서 몸을 풀고 녹아드니 다시 근사하게 태어난 사과처럼, 나 또한 비록 지금은 스스로를 무용하다고 여겨도 이 괴로운 생각이 거름 되어 반드시 땅을 뚫고 일어서는 찬란한 순간을 맞이하기를 바라며, 남은 한 입을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