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 필요한 날 먹는 음식
주말에 몹시 황당한 일을 겪었다. 잠시 모니터 앞을 떠났다가 돌아왔더니 어느 타인에게서 화가 잔뜩 담긴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해 있었다. 내 생각을 담은 메시지를 전달했으나 더 알기 쉽게 설명해달라는 연락이 왔었는데, 그사이에 잠깐 자리를 비웠던 것이 화근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20분 자리를 이탈한 잘못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할 틈은 허락받지 못한 채, 뾰족한 단어와 분개한 문장이 도착해 있는 것을 보고 놀랍고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듣지 않을 테니 말할 생각도 말라기에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화가 많이 났구나 라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기엔 돌을 던지는 치밀함이 예사롭지 않아서, 당황한 마음을 지인에게 얘기했더니, 따뜻한 클래식을 들으며 안정하라고 조언을 해줬다.
그날 늦은 밤, 왼쪽 눈이 부어올랐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낫기는커녕 눈을 깜빡일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병원에서 약을 받아먹고 업체 미팅을 마치고 집에 오니 이번에는 오른쪽 눈이 부어올랐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몸도 으슬으슬한 데다 황당한 일까지 겪어 심신이 말 그대로 눈탱이 밤탱이가 되어 버렸다. 이미 주변을 통해 놀란 마음과 속상한 기분을 위로받았지만 몸을 따끈하게 덥히고 싶어져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토마토 스튜를 끓이기로 했다.
토마토 스튜를 처음 먹어본 게 언제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 정도로 생각이 안 난다면, 먹어본 적도 없는데 먹어봤다고 착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요리책을 뒤적이다 새우 토마토 스튜 사진을 보고선 '음, 이거 맛있지'라고 아는 듯이 말했었는데, 이때 헝가리에서 먹었던 굴라쉬를 떠올렸던 것도 같다. 어쨌든 나는 직접 끓이는 게 처음이면서도 '토마토 스튜는 맛있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요리를 했다. 그리고 실제로 끓여 보고서는 그 맛에 풍덩 빠져들었고, 이후로 두어 번을 더 끓이기도 했다. 달큰한 토마토가 내는 국물에 버섯, 가지, 양파, 당근, 애호박, 청양고추가 뭉근하게 어우러진 토마토 스튜. 매콤하면서도 달짝지근한 것이 제법 사람 속을 든든하게 채우면서 마음까지 토닥일 줄 알다니, 그야말로 최고의 컴포트 푸드(comfort food)라 위로가 필요했던 날 자연스럽게 이 음식을 떠올렸던 것 같다.
번역가가 되면서 속상한 마음과 외로움에 사무친 감정을 혼자 삭혀야 할 때가 훨씬 많아졌다. 1인 기업으로 일하다 보니 거래처로부터 부당한 일을 당해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고, 고심하여 선택한 번역문이 고심하지 않았다고 여겨질 때는 충분히 나의 입장을 설명하긴 해도 여전히 속은 답답하다. 응원해 주는 고마운 동료 번역가와 직종은 달라도 같은 프리랜서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힘내라고 해 주지만 그래도 결국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홀로 한숨을 쉬거나 멍하니 밖을 보며 감정을 흘려보내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주변 사람들을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떠나보낼 때가 많아져 가뜩이나 친구가 부족한데, 직업마저 홀로 재택근무하는 번역가를 택했으니 오죽하랴. 직접 선택한 일이라 별수 없다고 해도 쓸쓸한 건 쓸쓸한 거니까 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해 먹는 일에 재미를 붙이려 드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직접 한 끼를 책임진다는 건 해 먹을 능력이 있다는 걸 의미하기에 나는 나약하지 않으며 다시 일어설 힘이 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행위 같다고 생각했다. 옆에서 손잡아줄 누군가가 있다면 당연히 좋겠지만, 결국 내가 먼저 나를 다독여주지 않으면 근본적인 내면의 힘이 길러지지 않을 테니까. 냉장고에 있는 야채를 깍둑깍둑 썰면서 한 생각치고는 좀 거창한 것 같긴 하다.
내 사랑 현미밥 반 공기에 갓 끓여낸 토마토 스튜를 듬뿍 얹고 파슬리와 후추를 솔솔 뿌리니 행복한 향기가 났다. 포장마차 어묵 먹듯 호호 불어먹는 게 재밌었다. 뜨거워도 한 숟가락 가득 퍼서 입에 넣으며 '구나겠지'를 떠올렸다. '화가 났었구나,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거겠지. 내 행동이 불편했나 보구나, 그 얘길 하고 싶었던 거겠지.' 매사에 적용하며 살지는 못하지만 '구나겠지'의 미학은 언제나 옳고 도움이 된다. 슴슴하고 달콤한 스튜의 마지막 한 입을 입에 넣고선 마무리로 큼직한 총각김치 하나를 먹었다. 아삭한 무를 오독오독 씹으니 그 특유의 개운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이 총각김치는 스튜를 먹을 때마다 반찬으로 먹는 게 아니라 마지막 한 입으로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짝 짭짤하고 시큼한 듯한 무 김치를 먹기 위해 슴슴한 스튜를 입에 털어 넣는 꼴이 되는 데다 토마토와 야채가 주는 즐거움에 집중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총각김치 부스터를 힘입어 식탁에서 일어나 이렇게 외쳤다.
"우울하고 속상한 하루는 이제 이 한 그릇으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