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달걀 밥찜

수요일마다 찾는 최고의 한 끼

by 정재이

큰일 났다. 마감이 겹치고 겹쳤다. 화요일 저녁부터 시작해 목요일 오후까지, 약 48시간 동안 총 작업 다섯 개를 해내야 한다. 화요일 저녁부터 자정까지 패션 아이템 번역, 자고 일어나서 수요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패션 기사와 여행 번역(지명과 지역에 관한 짤막한 설명문 업데이트 작업으로, 남에게 설명할 땐 여행 번역이라고 말한다), 조금 쉬다가 다시 저녁부터 자정까지 패션 아이템 번역, 자고 일어나서 목요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패션 기사 번역 감수 작업, 이렇게 총 다섯 가지다. 작업 한 가지는 줄일 수도 있었는데 거절을 모르는 프리랜서 번역가로 지내온지라 1분 정도 망설이다가 진행 가능하다고 회신했다.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모니터 앞에 조금만 더 앉아 있으면 되는 거니까 수고하자는 생각에 수락했는데 실천으로 옮기려니 마음은 예민하고 어깨는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겨우 하나를 끝내고 수요일 아침을 맞았다. 해결해야 할 작업이 네 개나 남아 식탁이 아닌 책상 앞 취식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배는 고픈데 눈앞의 작업은 놓을 수가 없을 땐 뭘 먹으면 좋을까. 그냥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하다가 미리 소분해 얼려 둔 현미밥, 볶음김치, 달걀을 꺼냈다.


익은 김치를 기름에 살짝 볶은 뒤 내열 용기에 담아 밥과 섞은 다음, 계란을 깨서 그 위에 올린다(볶음김치가 있다면 조리 과정이 더 가벼워진다). 젓가락으로 노른자를 터뜨려 적당히 휘휘 저어주고 물을 살짝 부어 뚜껑을 덮는다. 전자레인지에 넣어 3분 정도 조리하면 김치 달걀 밥찜이 완성된다. 마지막에 넣은 물 덕분에 수분을 머금은 폭신한 계란과 짭조름한 김치가 조화를 이루고, 톡톡 씹히는 맛이 일품인 현미밥이 김치의 짭짤한 맛을 한 번 더 중화시켜 주니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간단하고 든든한 한 끼 식사가 완성된다. 뚜껑을 여니 김이 모락모락난다.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한 채 밥을 한가득 퍼서 호호 불어먹으니 움츠러든 어깨와 비어 있던 속이 풀리는 기분이다. 이러고 앉아 있는 날 보던 어머니가 아침에 끓인 시금치 된장국을 데워서 배달해 주셨다. 국물까지 들어가니 온몸이 뜨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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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은 언제나 바쁜 날이다. 이렇게 보낼 때가 많다. 패션 기사를 의뢰하는 회사가 해외에 있는데, 해외 현지 시간으로 늦은 오후쯤, 그러니까 한국 시간으로 자정에서 새벽 2시 사이에 기사 원문을 보내 주기에 어떤 내용의 기사를 번역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잠을 청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9시쯤 일어나 기사를 확인하는데 비교적 짧은 기사가 나오면 여유롭게 모닝커피를 내리고, 1천 단어가 넘는 기사가 나오면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찬물로 세수부터 한다. 단어 수가 많으면 아무래도 부담감이 늘어나는 데다 졸린 눈으로 원문을 봤다가는 내 맘대로 읽거나 빼 먹는 부분이 생길 수 있어서 빨리 잠을 깨려고 노력한다. 아니, 그리고 꼭 마감이 겹치면 1천 단어가 넘는 기사가 배정되는 것 같다. 머피의 법칙인가? 왜 마감은 동시에 찾아오는 걸까? 짧은 시간에 여러 일이 몰리면 밀물이 강둑까지 아슬아슬하게 차올랐다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다가 맥이 탁 풀려 널브러지고 만다. 4년 차 번역가라 이런 일과가 익숙하다 해도, 언제나 신선하다.


힘들어도 각양각색의 패션 디자이너가 들려주는 비하인드 스토리나 트렌드 이야기를 내 손으로 번역하는 순간이 좋다. 패션 기사라 해도 옷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요리, 여행, 환경 등 다양한 범주를 아우르기 때문에 오늘은 어떤 기사를 만나게 될까, 설렘과 긴장감 그리고 분주함으로 매주 수요일을 맞는다. 나태해지기 쉬운 일주일의 중반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서슴지 않는 디자이너들의 강렬한 도전 정신에 고무될 때가 많다. 그저 비싸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옷에 고뇌와 노력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고, '스스로를 존귀히 여기라'는 디자이너의 인터뷰 맺음말을 온종일 떠올리며 하루를 감사하게 보내기도 한다. 내게 수요일은 기사 번역 작업을 통해 좋은 기운을 얻는 시간이다. 단, 말속에 풍자나 비유가 많으면 적절한 한국어 표현을 찾느라 작업을 마치면 녹초가 되어 버리긴 하지만.


이메일을 전송하고 기사 번역의 여운과 늦은 오후를 만끽하고자 커피 한 잔을 더 내렸다.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4시간이 훌쩍 넘었고 해는 중천에서 내려갔지만, 소박해도 갖출 건 다 갖춘 믿음직스런 첫 끼 덕에 속이 허하진 않았다. 오히려 편안하기도 했다. 조급함 때문에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지 않길 잘했다. 앞으로도 그러지 말아야지. 일상도, 글도, 번역도, 작지만 강했던 오늘의 한 끼를 닮아가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당분간 수요일은 김치 달걀 밥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