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먹는 즐거움을 알게 한 요리
2020년 8월 23일, 본격적인 해 먹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본래 건강하게 살을 빼기 위하여 다이어트 요리책에서 소개하는 요리를 매일 한 가지씩 해 먹는, 영화 <줄리 앤 줄리아>를 오마주하는 형태로 진행하고자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냥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로 바뀌어 갔다. 다이어트를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다. 프로젝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다이어트를 향한 의지였지만, 갈수록 '해 먹는 즐거움'이 덤으로 붙어 꼭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줄리는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다. 매일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 과정까지 기록하여 원하던 성공을 거머쥐었으니 말이다. 더불어 줄리는 현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스트레스와 일상 속 고단함을 요리로 풀어내는 일이 생각 이상으로 건강하고 희열 있는 행위란 걸 내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줄리를 흉내 낼 요량으로 집에 있는 요리책을 뒤적이다 처음 직접 만들어 먹을 요리로 우엉 두부 볶음밥을 선택했다. 집 반찬통에 찔끔 남아 있던 우엉조림과 된장국 끓이고 남은 두부, 야채실 한 칸을 늘 차지하는 양파와 당근이면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요리였다. 건강한 다이어트를 위해 밥도 100% 현미로 지어 냉동실에 소분해 두었으니 뚝딱 만들기 좋아 보였다. 무슨 맛일지 상상이 되기도 했지만 실제로 먹으면 어떨까 궁금하기도 해서 번역 작업을 시작하기 전, 점심으로 만들어 먹기로 했다.
고소한 두부 물기를 살짝 제거한 뒤 깍두기처럼 네모나게 썰어 기름을 두르지 않은 달군 팬에서 적당히 노릇하게 구워낸 다음, 이번에는 기름을 콩알만큼 넣고 다진 양파와 당근, 조각낸 우엉조림을 볶다가 두부를 다시 넣고, 현미밥 반 공기를 넣어 주걱으로 두어 번 뒤집어 주니 무척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났다. 우엉에 이미 스며든 간장과 올리고당 때문인지 소금 한 꼬집 넣지 않아도 간이 맞았다. 식감이 재밌는 재료들만 모아 놓아서인지 제법 씹는 맛도 좋았다. 나는 이때 직감했다. 난 우엉 두부 볶음밥을 매우 자주 만들게 될 거란 사실을, 그리고 직접 밥해 먹기 놀이가 꽤나 오래 지속될 거란 사실을 말이다. 재밌는 게임과 맛있는 음식은 질릴 때까지 붙잡는 성격인데, 호기심으로 만들어 본 요리가 생각 이상의 맛과 즐거움을 주었으니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재료는 소박했지만 포만감 대왕인 두부가 속을 꽉 채워주니 야식이 생각나지 않는 게 신기했다. 주로 저녁 시간부터 새벽까지 패션 아이템 번역 작업을 해야 해서 야식 먹는 데 주저함이 없던 나였는데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부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다짐했다. 괜히 배고픈 듯한 기분이 들더라도 배에서 소리가 나지 않으면 '넌 배고프지 않아'를 여러 번 외쳤다. 그런데 이 볶음밥은 괜히 배고픈 것 같은 기분도 들지 않는 데다 단백질까지 풍부했다. 담백하다고 얕봤는데 그럴 일이 아니었다. 얼큰한 컵라면 국물에 눈이 번쩍 뜨이는, 그런 획기적인 맛은 아니었지만 속이 편안했다. 문득, 마지막 한 입을 입에 넣으며 내가 하는 모든 번역 작업이 이런 담백한 맛을 닮아가면 어떨까 싶었다.
바야흐로 우엉 두부 볶음밥을 해 먹기 일주일 전,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시원한 스터디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책상에 앉았다. 다들 몸보신하느라 바쁜 말복 날, 나는 고객사에서 보내온 피드백을 하나하나 읽고 노트에 펜으로 써 가며 어떤 부분에 불편함이 있었는지 확인할 계획이었다. 얼굴이 화끈해지고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으나 피드백을 확인하고 다음 작업에 반영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중에는 황당하고 억울한 피드백이 있기도 한데, 이 경우가 그랬다. 사전이 제시한 한국어 명칭을 그대로 활용했는데 그 부분이 잘못 되었다며 꼬집기도 했고, 감수자까지 나서 굳이 수정되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고 의견을 내도, 단호히 'No'라고 말하는 고객사의 태도에 벙하기도 했다. 번역도 일종의 서비스이기에 고객이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지만, 아무리 문제없는 번역문일지라도 최종 확인자가 잘못됐다고 하면 잘못된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그로부터 며칠 뒤 어쩌다 번역계 대선배와 짧게 일대일로 대화 나눌 기회가 생겨 이런 마음을 고백했다. 앞뒤 상황을 모두 설명할 시간은 없어서 앞으로 번역가로서 어떻게 성장해가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했을 때, K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자리에서 최고가 되어 보는 건 어때요? 승연 씨가 맡고 있는 작업과 그 작업 담당자에게 보란 듯이 인정받는 거죠. 현재 맡은 작업이 번역가로서 성장하는 데 반드시 도움이 될 거예요. 그렇게 실력을 조금씩 쌓으면서 반드시 다가올 좋은 기회를 같이 노려봐요."
너무나 뻔하고 당연한 그 말이 구원의 한마디로 다가왔던 걸 K선배는 알까. 수고와 열심으로 프로젝트를 해내었더니 손에 쥐어진 건 '고객의 마음에 들지 않는 번역문 목록'이라 속상했고, 나름 오랜 시간을 버틴 것 같은데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아 초조함을 느끼고 있던 내 속을 꿰뚫은 답변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K선배는 번역가로서 어떻게 스스로를 발전시켜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만 들었을 뿐, 거래처가 어쨌네 저쨌네 하는 내 자초지종은 하나도 듣지 못하셨다. 도망치지 말고 마주하라는 말에 개운해진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그 순간 내게 필요했던 말이었나 보다. 이 조언은 나를 지독했던 프리랜서 4년 차 슬럼프에서 꺼내 준 말인 동시에 피드백 목록을 다시금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자고 다짐하게 한 말이기도 하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며 전투에 임할 준비를 했다. 얼마 전 피드백을 꼼꼼하게 검토했던 바로 그 작업이 추가로 들어와서 하루에 2천 단어씩 작업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피드백 지뢰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지만, 이번에는 피드백 개수를 줄여 주겠다는 오기와 도전 의식이 생겨 작업 의뢰를 수락했다. 싱크대 수도꼭지 물소리가 끝나면 나는 K선배의 현명한 조언을 따라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건강하고 든든한 맛으로 몸을 깨웠으니 이제는 그 맛이 스며든 몸을 이용해 담백하고 깔끔한 글을 탄생시킬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