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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어 Jan 04. 2019

그 천국의 면적은 단지 한 평이었다.

먼동이 트기 전인 어둑어둑한 새벽, 인력 시장에서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추위에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불을 피운다. 양철통 안을 꾸역꾸역 메운 장작들이 벌겋게 물들어 가면, 그 주위로 한 명, 두 명씩 모여든다. 삶의 고단함에 찌든 그들 표정과 몸뚱이가 마치 장작처럼 보인다.     


재래시장도 엇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두툼한 패딩을 입고, 목도리로 얼굴을 반쯤이나 가린 시장 상인들이 양철통 주위에 모여 불을 쬐는 모습에선 삶에 대한 악착스러움이 느껴진다. 추위에 얼어서인지, 아니면 양철통이 뿜어내는 열기 때문인지, 목도리 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그들의 뺨이 불길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비록 낡고, 찌그러지고, 볼품없는 양철통이지만 장작을 품으면 고급 저택의 벽난로 못지않게 아늑함을 자아낸다. 추위를 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안락한 공간도 마련해준다. 양철통 안의 불길이 차디찬 바람에 춤사위를 펼치며 추위에 웅크린 사람들에게 “어서 이리 와서 몸 좀 녹이세요.”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다. 그 정다운 손짓에 시장 상인들은 그곳으로 다가가서 덥석 손을 잡듯 불길에 양손을 맞댄다. 그 풍경은 언제 봐도 정겹다.      

그 생물 같은 불길이 나를 과거로 이끈다. 강원도 화천은 겨울이 길고, 춥다. 겨울이 되면 우리 부대에서는 개울가 옆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칡즙을 달였다. 사방이 온통 눈에 덮인 곳이라 서산으로 뉘엿뉘엿 저무는 해가 더 붉고, 눈부시게 보였다. 그 무렵 일과를 마친 부대원들은 가마솥 주위로 모여들었다. 가마솥 안에서는 조청처럼 진득진득한 칡즙이 특유의 향을 흩뿌리면서 보글보글 끓고, 그 아래에서는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탔다.


   


장작은 탈 때 그윽한 향을 냈다. 갓 볶아 낸 커피보다 더 구수한 향이 났다. 칡즙에서 풍기는 향보다 장작에서 풍기는 향이 더 좋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 향과 온기는 코를 통해 온몸으로 퍼져 겨울 정취를 만끽하게 해 줬다.     


어둠이 짙게 깔리면 장작불은 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활활 타올랐다.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길게 목을 뺀 채 불길을 들여다보는 부대원의 얼굴이 불빛에 물들어 붉은 단풍처럼 보였다. 장작을 이리저리 옮기며 불길을 조절하는 손길이 분주했다. 그의 손등도 얼굴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고, 표정에서도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나누는 말들은 옥에 티가 됐다. 마치, 여백을 중시하는 동양화에 불필요한 그림을 채워 넣는 것처럼...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숨소리조차 삼키고, 묵묵히 어둠과 새빨갛게 피어오르는 불꽃과 그윽한 향에 심취됐다.     


어둠 속에서 새빨갛게 피어오르는 불꽃은 신성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 순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탕 속에 온몸을 깊숙이 담그는 상상을 했다. 뜨끈한 물이 온몸을 스멀스멀 감을 때,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면 온탕은 천국이 됐다.     


연극인 박정자 씨가 ‘연습실이 천국’이라는 말을 했다. 지금 나의 천국은 어디일까? 나이가 들수록 천국의 면적이 줄어드는 것만 같다. 나만 그럴까?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겨울 저녁에는 그때 그 상황을 떠올려본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아련한 기억 속으로 빠져들면 가마솥 안에서 보글보글 끓던 칡즙의 향과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르던 장작불의 온기가 느껴진다. 그때 한 평 남짓한 그 공간이 나에게는 천국이었다. 그 천국은 해마다 겨울이 되면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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