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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어 Jan 04. 2019

회항하라, 기억 저 편을 날아다니는 종이비행기

가을 산이 오색 물감을 흩뿌려놓은 듯 황홀하다면, 겨울 산은 아득한 태고의 자취를 머금은 듯 신비롭다. 인적도 없이 온통 눈으로 뒤덮인 겨울 산은 장엄한 느낌까지 든다. 그곳에서 나는 그저 동양화 속의 미세한 점이 된다. 


눈이 배꼽까지 쌓였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겨울 산의 형세는 더 위엄 있게 다가온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상황에서도 미동조차 않고, 묵묵히 선 나무들에게서는 굳은 지조가 느껴진다. 그 모습에서 위엄 있는 충신의 자태가 보인다.



산짐승들의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는 눈밭을 헤치고 걸으면 새삼 자연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산은 나를 받아들이듯 눈보라를 휘날리거나 귀에 거슬리는 바람 소리를 내지 않고, 평온하다. 따사로운 한낮의 햇살로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적막을 깨고 툭, 툭 떨어지는 소리는 자장가처럼 아늑하고, 정감 있게 들린다.     


산등성이에 햇빛이 넘실대면, 그곳은 검은색 먹만으로 그린 ‘수묵화’에서 이제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풍경화’로 바뀐다. 대자연의 수려한 풍경에 몰입한 순간, 인간이 주고받는 말은 한낱 잡담이 된다.     


한정된 기억의 용량으로도 그때 그곳의 풍경이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다른 추억들을 삭제해 버리고, 그 기억만큼은 고스란히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곳은 온통 눈으로 뒤덮인 설원 이리라. 밤의 정령이 깃든 겨울 산을 별빛과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모습을 떠올리면 왠지 마음이 순수해진다.     

도시에서도 겨울밤은 산사처럼 적막하다. 아련한 기억 저 편을 날아다니는 종이비행기가 이제 회항해서 방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내 가슴 위에 사뿐히 착륙한다.


밤의 정령이 깃든 겨울 산... 그곳을 은은하게 비추는 별빛과 달빛... 그 빛이 삶의 고단함으로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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