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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Jul 04. 2023

지렁이를 만난 날

나는 카페노예다 <13>

비가 억수로 퍼부은 다음날. 소싯적 즐겨 듣던 팝송 ‘하늘에서 남자가 비처럼 내려와(It’s rainning men)’를 흥얼거리며 카페 주차장에 도착하니 눈앞에 막대기처럼 긴 뭔가가 보인다. 그냥 나뭇가지인 줄 알았더니 웬걸 꿈틀거리네. 지렁이다.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토룡인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누구는 징그럽다고 할지 모르지만 오랜만에 보는 50대에게는 참 반가운 존재다. ‘어릴 적에는 정말 많이 봤는데.’ 물난리가 났을 때 살기 위해 몸만 빠져나온 반지하방 사람들처럼, 지렁이도 물이 쏟아지는 생활공간을 벗어나 낯선 지상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It’s rainning men' 원곡을 부른 스파이스걸스

꿈틀꿈틀 힘겹게 몸을 움직인다. 무슨 생각을 할까. 땅 속에 버려두고 온 식량을 어떻게 하나 고민할까. 몇 날 며칠을 낑낑거리며 마련한 땅속 집이 물에 잠긴 것이 허탈할까. 아니면 같이 빠져나오지 못한 다른 가족들이 걱정될까.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만 봐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몇십 년 전 사람인 나도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가족 모두가 반지하에 살던 시기 장대비가 쏟아지더니 순식간에 집안으로 물이 밀어닥쳤다. 결국 몸만 빠져나와 위층 주인집으로 대피했다. 자개도구, 먹을 것, 가전기기들은 모두 물속에 잠겼다. 다음날 물이 빠지고 난 뒤 가봤더니 진흙밭이 따로 없었다. 영화 '기생충'에 격하게 공감한 것도 이 때문 아닐까 싶다. 덕분에 북한에서 보낸 쌀과 천을 받기는 했다.(내가 기억하는 한 북한에서 남으로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구호물자인 것으로 알고 있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주차장에는 흙이 없다. 시멘트 바닥 위에 깔아놓은 자갈들이 전부다. 흙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5m가량은 가야 한다. 인간들에게는 대여섯 걸음, 시간으로 치면 2~3초면 가면 충분한 거리지만 발이 없어 느릿느릿 기어가야 하는 이 반가운 생명체는 다르다. 적어도 10분 이상은 가야 한다. 지렁이의 수명은 대략 3~4년에 불과하다. 인간의 20분의 1 정도다. 지렁이를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3시간 훨씬 넘는 거리를 걸어가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땅을 만날 수 있다.

이것도 운이 좋을 때의 얘기다. 사람들이 발밑을 보지 않고 지나간다면, 중간에 자동차가 주차장에 들어온다면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뙤약볕이 쬐는 날에는 가는 도중 몸이 말라버릴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행진이다. 한 곤충학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에겐 좁은 골목길이 작은 풀벌레에게는 대양과 같이 넓게 느껴질 겁니다.” 제발 살아서 돌아갔으면 하는 간절함이 어느 순간 머리를 채운다. 

사실 걱정해야 할 것은 지렁이뿐이 아니다. 카페 해안가 쪽(창가) 자리 바로 아래는 나무와 우거진 수풀 천국이다.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는 잡초 또는 덩굴이 서로 뒤엉켜 있다는 것은 이들을 벗 삼아 사는 곤충을 비롯한 작은 생명체들 역시 활발히 활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페가 들어서기 훨씬 전부터 이들은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을 것이다. 애초부터 지구의 주인이 곤충이었듯이 이곳의 실질적인 소유주 역시 이들이다. 우리는 단지 이 땅을 다른 사람에게 구입했다는 글씨가 쓰여 있는 종이쪼가리 하나로 내 땅이라고 우길뿐이다. 수만 년 또는 수십만 년 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터전에 어느 순간 두 발로 서서 다니는 생명체가 나타나더니 어느 순간 자신들의 삶의 안식처를 차지하고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니 벌레나 지렁이의 입장에서 보면 어이가 없을 것이다.

그나마 소유권만 가지면 상관없다. 어느 날 카페에서 컵을 씻다 보니 개미 몇 마리가 열심히 돌아가니고 있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것일 터. 아마도 카페 부근 어딘가에 집을 짓고 집단 거주를 시작한 모양이다. 어쩌면 우리가 건물을 세우기 훨씬 전부터 이들의 조상들이 살았을지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눈에 거슬린다. 손님들도 싫어한다. 없애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온몸을 감싼다. 

인간은 참 잔인한 동물이다. 개미가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꾹’ 하고 손가락을 누른다. 좀 징그럽다 싶으면 파리채나 휴지를 이용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잡는다. 그것도 귀찮으면 에프킬러 같은 살충제를 뿌린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일어난 걸프전쟁 당시 선전포고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를 우리는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고 이들에게 뿌려댄다. 결국 항복을 얻어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항복을 얻어냈으니 나는 승리했다. 그런데 어째 개운치가 않다. 어렸을 때는 곤충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따라가며 깔깔대고 즐거워했다. 이제는 동심이 사라지고 대신 삶의 절박함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생이 갈수록 각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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