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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윤 Aug 22. 2022

호구에 관하여

About Hogu

근래에 호구 취급당했다는 기분이 든 일이 있었다. 오랫동안 믿고 거래해 왔던 협력업체가 파산을 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업체의 거래처 중에 우리 회사에 갚지 않은 채무금액이 가장 컸다. 우리는 대금 지급이 밀릴 때마다 혹독하게 독촉하거나 거래를 끊겠다고 협박을 한 적이 없다. 잘해주고 계속 믿어줬더니 결국은 돈을 가장 늦게 갚아도 되는 만만한 기업으로 여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기를 당했을 경우 느꼈을 분노와는 다른 류의 화가 치밀었다. 믿음을 준 대가로 돌아온 후회와 개탄스러움이라고나 할까. 영어로 furious 보다는 regretful 한 감정 말이다.  


우리 회사 권장 도서 1호는 애덤 그랜트의 <Give and Take>다. (https://www.etnews.com/20150813000274). 직장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남에게 베풀기보다는 내 것을 우선 챙기려는 사람(taker), 남에게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만 주려는 사람(matcher), 그리고 당장 눈앞의 자기 이익을 챙기기보다 남에게 베푸는 데 더 관심이 많은 사람(giver). 상류층에는 자신의 몫을 챙기는 데에 탁월한 matcher들이 많지만 최상류 층에는 giver들이 주를 이룬다는 내용이다. 반면 최하층에도 giver들이 많다는 설명이 있다. 최상류 층의 기버와 최하류 층의 기버는 어떤 점이 다를까?


골프에서는 '도시락'이라는 용어가 있다. 골프를 소풍으로 비유하면 도시락 역할을 하는 사람이 꼭 한 명 있다. 내기에서 매번 돈을 털리는 사람이 바로 도시락이다. 영어로 호구를 pushover라고 하는데, 밀면 넘어가는 이기기 쉬운 상대를 말한다. 


호구의 또 다른 영어 표현은 doormat이다. 신발 터는 용도로 문 앞 바닥에 까는 매트. 기버 중 최하류 바닥에 깔려 있는 이들 상당수가 바로 이 호구일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주기만 하고 이용당하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회사 영업/마케팅 팀에 나는 고객 -주로 학부모들- 에게 마음껏 퍼주라고 한다. 퍼주는 음식점 망하는 경우 없다고 얘기해 주면서. 최상류 층의 giver가 되기 위해서다. 동료들 간에도 자기가 좀 손해 보는 쪽으로 도움을 더 주는 사람이 되라고 말해 준다. 그래야 matcher와 taker들을 이끄는 리더로 성장할 수 있다. 반대로 음식점 가서 추천하는 메뉴가 뭐냐고 묻지는 말라고 한다. 호구가 될 수 있다. 식재료 재고가 많이 남은 메뉴를 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음식 장사를 해 봐서 안다). 


그렇다면 기버가 되더라도 최하류 층의 호구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잔머리 굴릴 필요 없이 실력을 갖추면 될 일이다. 


"Fool me once, shame on you. Fool me twice shame on me."


내가 한 번 속으면 그것은 속인 사람이 나쁜 것이지 믿어준 내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두 번 속는다면 그건 내가 어리석고 실력이 없어서 그럴 뿐이라는 의미이다. 실력 있는 자를 두 번 속여 먹으려 들다가는 큰 코를 다치기 마련이다. 골프를 칠 때 전반 9홀을 돌 동안 돈을 계속 잃는 동반자를 우습게 알다가 후반에 자신이 몇 배로 털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도시락이 아니라 몸이 안 풀렸던 실력자였거나, 일부러 전반에 져주고 후반에 판돈을 키워 쓸어가는 타짜였거나.   


믿어주고 잘해 줄수록 관계가 두터워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뢰를 보내는 상대를 오히려 만만하게 보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게 되면서 만만한 관계로 느슨해 질 때가 있다. 실력자 giver는 느슨해 진 줄을 언제든 팽팽하게 당길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전반에 돈 땄다고 기고만장하는 동반자가 있다면 후반에 니어에 버디로 피박 광박을 씌워 얼굴에 웃음기를 닦아 주기도 해야 쫀쫀한 플레이가 이어지면서 골프가 재밌어지는 것이다. 


둘째,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사명을 가져야 한다. 


국민교육헌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런 우영우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말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사명이 필요하다. 개인도 법인도 마찬가지다. 사명감을 보이는 사람을 호구 취급하는 것은 웬만해선 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 회사는 명확한 사명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가고 있다. 혹자는 꼭 무슨 사명 없이도 행복해질 수도 있다고 하고, 서점에서는 꿈 없어도 괜찮아 류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한다. 그건 뭘 모르고 하는 호구 소리다. 사명이 없다면 욕망을 쫓을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다. 욕망의 끝은 항상 후회이다. 후회는 자신과 주변을 다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행복의 반대편에는 후회가 자리 잡고 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명을 가져야 한다. 미쿡말로 미션. '사명'을 쫓아야 하는 것이지 '행복'은 쫓아봐야 소용없다. 행복은 쫓는 게 아니라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있다. 가는 대신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일. 잠 같은 것 말이다. '잠이 안 와요'라는 표현과 같이 잠에게 가 봐야 달아날 뿐이다. 행복은 잠처럼 와야 하는 것이다. 사명을 쫓으면 행복이 오기 마련이다. 마침내.   


사명을 달성한 후에도 기대만큼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허무가 엄습해 올 수 있다. 그러나 그 허무감은 자신에게만 머물고 주변에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자신과 주변을 모두 죽이는 후회와는 다르다. 그래서 사명은 '돈 많이 벌자' 같은 개인적 목표가 아니라 개폼을 잡더라도 '주변을 이롭게 하는 쿨한 것'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정 사명이 없다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것으로 치고 그것이라도 사명으로 삼길 바란다.




위에서 나는 호구가 된 기분을 영어로 regretful 하다고 했다. 괜히 믿어줬구나 하는 후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믿어주고, 퍼주고, 조금의 손해는 감수하는 giver가 되어야 한다. 명확한 사명을 위해 실력을 갖춘다면 호구 같은 giver가 아니라 최상류 층 giver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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