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대학은 좀비입니까?

한국대학신문 기고문

by 김성윤

살아있는 시체를 ‘좀비’라고 부른다. 다행히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좀비를 소재로 영화와 드라마를 만들고, 자아 없이 휩쓸려 다니는 현대인을 풍자하는 비유로 활용하곤 한다. 그런데 과연 좀비는 상상 속의 존재일 뿐일까?


기업 생태계에는 좀비가 엄연히 실재(實在)한다. 공식적으로는 ‘한계 기업’이라 불리는 이른바 좀비 기업은 영업이익으로 이자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회사를 의미한다. 2024년 통계에 따르면 상장사의 21.8%, 코스닥 기업으로 한정할 경우 무려 41%에 육박하는 기업이 좀비 상태다. 다행히 현 정부는 이들 좀비 기업의 정리를 통해 증시 전체의 체질을 개선하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재무적 수치만으로 좀비 여부를 가릴 수 있을까? 필자의 기준으로는 우리 사회의 좀비 기업 비율은 통계보다 훨씬 높다. 개인(個人)과 마찬가지로 법인(法人)에도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경영학 개론서는 기업은 '이윤 창출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거나 ‘주주 이익 극대화'를 그 목적으로 정의한다. 이 잣대로만 보면 영업이익이 이자비용을 밑도는 기업만 좀비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생명력을 가진 법인이라면 “너는 누구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차원이 다른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많은 기업이 홈페이지에 거창한 경영 이념과 미션을 걸어 놓는다. 정직, 소통, 존중을 최고의 가치로 내걸었던 미국의 엔론(Enron)은 한때 시가총액 7위의 대기업이었으나, 사기와 분식회계로 파산하며 경영진 대부분이 쇠고랑을 찼다. 당시 내부 고발자였던 셰론 왓킨스는 “우리는 정직을 말했지만, 행동은 정반대였다”고 실토했다.


국내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도경영’을 표방하는 기업 중에는 창업주부터 3세 경영인까지 각종 불법으로 ‘전과’를 이어가는 곳이 적지 않다. ‘핵심 가치’라고 쓰고 ‘아님 말고’라고 읽는 식이다. 돈만 잘 벌 뿐 영혼이 없는 기업들은 지금도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다. 이것을 좀비가 아니고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모 기업의 핵심 가치 중 일부>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은 ‘모든 직원의 행복을 추구함과 동시에 인류와 사회 발전에 공헌하는 것’을 경영 이념으로 삼고 이를 철저히 실천했다. 그는 이익 창출을 넘어 ‘고객으로부터 존경받는 회사’라는 높은 차원의 신념을 세웠고, 그것은 곧 교세라의 정체성이 됐다. 그의 저서 《왜 사업하는가》라는 제목에서 우리는 좀비를 구분하는 결정적 기준을 발견한다. 바로 ‘Why(왜)’의 유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 교육 현장은 대량의 좀비를 양산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왜 이 대학에 가려고 하는지, 왜 의사가 되려 하는지 물으면 돌아오는 답에 현기증이 난다. “연봉 하방이 1.5억이라서요”, “전교 1등인데 의대 안 가면 공부한 게 아깝잖아요”. 서울대 의대에 가장 많이 합격하는 곳이 서울대 자연대라는 우스갯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이유다.


필자가 경영하는 회사의 핵심 가치 문서에는 ‘우리가 바라보는 교육에 대한 입장문’이 담겨 있다. “교육의 목표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독립적인 개인이면서도, 공동체 봉사를 인생의 가장 고귀한 가치로 여기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다.” 이 문장은 아인슈타인이 과거 뉴욕타임스에 기고했던 ‘대학의 교육 목표’에서 빌려온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해당 기고문에서 “학생이 가진 능력이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증명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 능력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태도를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인류 공동체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그의 경고는 오늘날 더욱 유효하다.


AI가 인간의 전문성을 이미 초월한 시대, 우리는 비로소 본질과 마주하게 됐다. AI는 스스로 ‘Why’를 묻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유한한 삶 앞에서 “나는 왜 존재하는가?”를 물을 수 있다.


지난 여름 필자는 본지 기고문(AI 시대 기업이 대학에 기대하는 것)을 통해 전전두엽이 발달한 ‘Why형 인재’만이 AI 시대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피력한 바 있다. 그러면서 이중언어 교육, 독서와 토론, 사회문제 감수성 교육이야말로 대학이 사회에 기여하는 진정한 길이라고 호소했다. 이 호소에 앞서, 대학 현장에 외람되지만 무거운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다.


“여러분의 대학은 좀비입니까?”


(한국대학신문 2026.2.23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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