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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연 Jun 19. 2020

육개장과 육개장

유학생의 소울푸드 두 그릇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나와 동생이 라면을 비롯한 인스턴트식품을 거의 먹지 못하게 하셨다.

닭다리마저 직접 튀겨주셨으니, 라면이라고는 아버지가 혼자 끓여 드실 때 몇 젓가락 몰래 얻어먹은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어느덧 4학년이 되었다.


아마 4학년 봄이었던 것 같다.

여느 때처럼 학교를 마치고 학원에 갔는데, 쉬는 시간에 같은 반 친구들이 육개장 사발면을 사 와서 먹는 것이었다. 그 냄새에 나는 침이 고였다. 내가 너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봤는지 친구들이 결국 너도 한 젓가락 하겠냐고 묻기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접힌 라면 포장지에 담겨 김이 모락모락 나던 그 한 젓가락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육개장 사발면의 맛에 눈을 뜬 나는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육개장이 먹고 싶다고 졸랐다.

생전 뭐가 먹고 싶다거나 갖고 싶다고 조르지 않는 딸이었기에 어머니는 조금 놀라시면서 알겠다 하셨다.

그리고 며칠 후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네가 육개장 먹고 싶다고 해서 엄마가 열심히 끓여놨다!"


그때 나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냄새가 그 냄새가 아닌데?'

부엌에 가보니 냄비 가득 팔팔 끓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소고기와 숙주를 듬뿍 넣은 육개장이었다.

그 육개장이 그 육개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새 옆에 와 나의 오묘한 표정을 보신 어머니는 의아해하시며 "왜 그러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쭈뼛대다 결국 대답했다.

"엄마... 이거 말고... 라면..."


어머니는 헛웃음을 지으시면서 뒷목을 잡는 시늉을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어이구야! 내가 내 발등을 찍었구나! 라면이 그렇게 먹고 싶었니?"

어머니는 너무 어이가 없으셨는지 계속 웃으셨다. 결국 그날 저녁 어머니가 끓여주신 육개장에 밥 한 공기 뚝딱 말아 배불리 먹었다는 나름대로 훈훈한 결말로 이 "육개장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 집 식탁에 육개장이 오를 때면 언제나 어머니의 입에 오른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그저 허허, 웃으시고 동생은 조금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곤 한다.


그렇게 사실은 육개장 사발면이 먹고 싶어 어머니가 몇 만 원어치의 소고기를 사게 만들었던 초등학생은 이제 외국에서 혼자 이런저런 국이며 찌개도 척척 끓여 먹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작년 겨울 혼자 한인마트와 근처 슈퍼마켓을 돌며 사온 재료로 생전 처음 끓여본 육개장은 생각보다 맛있었지만,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부족했다.


그건 바로 육개장에 얽힌 기억을 공유하는 가족이었다.


오랜 기숙사 생활, 그리고 유학 생활로 혼자 먹는 밥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나지만, 그래도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 위에는 단순히 요리뿐 아니라 그 요리에 얽힌 기억들이 같이 오른다는 사실은 언제고 나를 조금 서글프게 만든다.


이제는 난생처음 딸이 먹고 싶다고 한 요리를 만들기 위해 소고기며 각종 재료를 사서 정성껏 손질하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감사함과 죄송함이 교차한다. 지금에서야 그때 그 육개장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 것이다. 어리고 철이 없었던 그 시절의 내가 정말로 먹고 싶었던 건 결국 라면이 아니라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는 그 육개장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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