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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연 May 30. 2020

어른이 된 후 친구를 만나면

인생이라는 강을 따로, 또 같이 건너는 우리들

어른이 된 후 친구를 만나면 인생이라는 강 위에 놓인 징검다리를 훅훅 건너면서 만나는 기분이 든다.


아주 절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에야 보통 일 년에 한 번, 아니면 이삼 년에 한 번 만나는 게 고작이니까.

특히 나의 경우 미국에 유학을 와 있는 입장이라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내가 귀국할 때에만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안타깝게도 막상 친구들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도 잠시, 그 귀한 만남들 사이의 일들은 휴학, 졸업, 취준, 취업, 결혼 등의 키워드로 압축되고 만다.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리저리 묻다보면 결국 더 깊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벽의 둘레만 계속 돌다 집에 오는 기분이다.


또 동시에 나의 근황을 아주 상세히 알고 있는 절친한 몇몇 친구들과는 내 머릿속에 있는 다양하고, 아주 사소하고 이상한 이야기까지 자유롭게 나눌 수 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의 존재에, 그 친구들과 나눌 수 있는 대화에 더욱 감사함을 느낀다.


그렇지만 어떤 대화를 나누든, 이렇듯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변화의 폭이 크다 보니 인생은 똑같은 일상의 반복인 것 같으면서도 서서히, 그리고 어느새 바뀌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른이 된 이후 깨닫게 된 것은 우리가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면서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공유하기에는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이를 상세히 공유하려면 그 공유의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삶을 살아야 한다. 인스타그래머, 유튜버, 블로거 등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그렇지만 꼭 수만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한 인플루언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소수, 또는 다수의 사람들과 우리의 일상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같은 학교, 직장, 또는 학원을 다니며 매일의 일상을 공유할 수도 있고, 연락을 통해 말과 글로 나의 일상을 전달하고 공유할 수도 있다.


우리는 왜 공유하는가?

공유를 통한 공감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나의 기쁨, 슬픔, 불안, 어려움 등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공감과 위로를 얻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내가 강을 건너다 빠지면 119에 전화하거나 구명튜브를 던져줄 사람 하나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보통은 가족이 이 역할을 수행한다고 믿는데, 말하지 않으면 엄마도, 귀신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사람이 꼭 주거 환경을 공유하는 가족 구성원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공유는 필수적이지만, 때때로 우리에게 타인과의 비교라는 심리적 난제를 던져주기도 한다. 이는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속도로 강을 건너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털털거리는 통통배를 타고 가는데, 누군가는 초고속 요트를 타고 저 멀리 질러가고 있으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우리는 모두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서로의 일상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페이스로 걸어가기란 쉽지 않다. 요트가 가른 물살이 나를 뒤로 밀어내고, 빠르게 사라지는 요트의 모습은 내가 뒤쳐졌다고 느끼게 한다.


그러나 몇 해 안 되는 인생 경험과 짧은 식견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강이란 뭇 흐르게 되어 있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다른 속도일지라도 강의 끝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하지 않았나. 세월은 흐르는 물이다. 인생은 흘러감의 여정이다. 긴 여행이다.

여행은 어디로 가는지보다는 누구와 가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누구와 함께 가고 있는지,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공유하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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