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연 May 27. 2020

자아성찰: 두 가지 역설에 대해

최선의 역설, 독립의 역설

요즘 오롯이 혼자에게만 집중하다 보니 평소 일기를 쓰거나 그냥 하루를 기록하는 것 이상의 자아성찰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자신의 상처와 불안을 직시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지만,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면 그 상처와 불안은 점점 커져서 더 큰 고통으로 돌아올 것임을 나는 안다.


내가 주기적으로 컴퓨터를 최적화하는 것처럼 내 마음도 최적화를 해줘야 한다.

내 마음에도 알약 PC 최적화 기능처럼 내 마음의 용량을 잡아먹는 임시파일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의 마음은 0과 1로 프로그래밍되어 있지 않기에 일은 복잡해진다. 그렇지만 그게 또 묘미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심도 있는 자아성찰이 나에게 행복과 만족을 주는 것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들에 에너지를 쓸 수 있도록 내 마음과 정신을 최적화시켜준다는 것이다. 지금 이 글도 그런 이유에서 쓰고 있다. 요즘 내 자아성찰의 필두는 요약하면 두 가지 역설에 관한 것이다.


첫째, 최선의 역설.

최선이라는 말에 속지 말자. 그것은 절대선이 아니다.

최선이라는 말 자체가 상대적이다. 무엇이 최선인지는 나 자신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충분히 바뀔 수 있다. 본인은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아니었던 경험, 다들 있을 것이다.

최선이 아닌 차선을 택했다고 내 삶도 "차선"의 삶이 되느냐? 아니다. 애초에 무엇이 최선이고 차선인지에 대한 판단마저 주관적인데, 내가 차선을 택했다면 그 시점 이후로는 그것이 최선이 되는 것이다.


나도, 상황도 변화했는데, 무엇이 최선인가에 대한 생각만 그대로라면 그것이 각주구검이다.

인생이라는 물은 흘러가는데, 그리고 파도는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고, 물결은 세지기도 하고 잔잔해지기도 하는데, 내가 몇 년 전에 배에 그어놓은 칼자국이 영원히 나의 이정표가 되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새로운 칼자국들을 낼 때마다 과거의 칼자국들을 보며 스스로의 변화를 인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나에게 이로울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자리를 잡아 버린 "최선을 다하자"는 모토. 최소 비용으로 최대 이윤을 내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 하에서는 "최선을 다하자"는 말이 결국 단순히 일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를 넘어 우리의 일터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남들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 도태되는 게 당연하다는 경쟁 논리와 자본주의 신화의 탄생이다.


이쯤에서 문보영 시인의 책 <준최선의 롱런>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고 싶다.

<준최선의 롱런>. 정말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준최선"이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균형, 이것이 핵심이다. 균형을 잃으면 되돌이킬 새도 없이 무엇인가가 빠르게 떨어지거나, 올라간다. 떨어지는 자존감, 올라가는 스트레스. 대표적인 예 아니겠는가. 빠른 속도와 발전이 최선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인 것 같다. 꼭 빠른 속도만이 최선이 아닌데.


이제는 거의 단군신화 급인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도 무조건 빨리 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 기동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장점들 중 하나일 뿐, 절대로 필승을 약속하는 장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너지를 초반에 폭발적으로 사용해 조금이라도 앞서 나가 보려고 할 것이냐, 에너지를 고루 분배해 자신만의 페이스로 갈 것이냐,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둘째, 독립의 역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청년들의 독립이 늦어지고 있다. 교육 수준이 올라가고 초혼 시기도 늦어지고, 자아 실현과 자기 계발에 대한 욕구가 유례없이 높다. 물론 나도 이 물결에 동참하고 있다.


나만의 공간, 나만의 길에 대한 의욕은 가득한데, 아직 독립이라는 단어는 조금 두렵다.

몸과 마음 모두 스스로 선다는 것이 은연중에 두렵기도 하고,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독립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이 느껴진다. 아, 독립해야겠구나. 이 생각의 빈도수가 잦아졌다.


그런데 친권이 강한 한국 사회의 특성상, 단순히 스무 살이 되었다고 내가 바로 차를 뽑아서 운전대를 잡고 쿨하게 부모님과 하이파이브 한 번 하고 슝 떠나갈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 같다.


우선 차는 비싸다. 우리는 돈이 없다. 우리는 아직 운전이 미숙하다. 운전미숙은 교통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가다가 길을 잃으면 어떡하지? 사고가 나면 어떡하지? 이 불안 심리 때문에 안전한 길, 부모님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걸어가고 싶은 욕구도 드는 게 사실이다. 일단은 그것이 안전해 보이니까. 그렇지만 부모님의 인생도 완벽한 30년 무사고 운전은 아닐 것이다. (물론 실제 운전 경력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운전은 안전이 최고죠 암) 그래서 더더욱 자식의 인생은 무사고 운전이기를 바라는 것일 테지만.


설사 내가 차도 사고, 운전 연수도 받아서 운전에 자신이 있어도, 부모님은 아직 조수석에 앉아 계시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어떻게 해라, 좌회전을 해라, 우회전을 해라, 어디로 가야 한다 등등.. 다양한 훈수를 두신다. 물론 도움이 되는 조언도 많이 해주시지만, 이제는 간섭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내가 스스로 설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려면 스스로 운전을 하는 것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부모님께서 차에서 내리시지 않으시면 내가 그걸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부모님께서 계속 조수석에 앉아 계시는 이상, 나는 완전히 독립하기 어렵다. 부모와 자식, 역시 어렵다.




매거진의 이전글 5월은 푸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