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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연 Aug 24. 2020

박완서 | 한 길 사람 속

이 시대의 어른

우선 이 책이 1995년에 처음 출간되었다는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 출간되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현 사회의 여러 사안에 대한 시원한 일갈이 담긴 산문집이다.


여행기 부분에서 작가의 출중한 풍경 묘사가 빛을 발하는데, 그의 감상과 회고와 잘 어울려 역시 박완서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한국의 근대화 광풍 속에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자의 담담함과 동시에 사라져버린 것들, 예를 들면 오염되지 않은 산천, 넉넉한 시골 인심과 같은 것들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느껴진다.


특히 이 구절이 인상 깊었다.

"우리는 내남없이 고도성장의 가도를 숨가쁘게 달려왔다. 행여나 중산층의 대열에서라도 낙오할까봐 고속도로를 달릴 때처럼 잘 빠질 때는 최고 속도를 놓고, 밀릴 때는 수단껏 끼어들고, 대가리를 처박고, 곁길로 빠지고, 우회도로를 찾고, 빵빵대고, 으르렁거리느라 그 경쟁에서 멀찌치 밀려난 이들이나, 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는 수단을 처음부터 갖지 못한 이들의 소외감과 적개심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 우리 모두 우리의 속도를 늦추거나 비켜서서 그들도 같이 가거나 먼저 보낼 수 있는 전용차선을 마련해줘야 한다. 더 늦기 전에."
                                                                           - 박완서, <한 길 사람 속>, p. 40-41


'어른'이란 이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정희진의 <낯선 시선>에서 '어른'이 없는 것보다, '어른'이 필요하다는 심리와 누군가가 '어른'이 되는 메커니즘이 더 문제라는 문장이 인상 깊었는데, 우리가 소위 '꼰대'라고 부르는 일부 어른들의 문제는 숙고와 배려가 부족한 말과 행동이 아닐까 싶다.


성급한 말과 행동보다는 깊이 있는 글과 생각으로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 박완서가 나는 진정한 어른으로 느껴진다.


작가는 가도 작품은 남는다.

두고두고 읽으며 새겨야 할 말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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