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제는 우리 가족 전체의 문제가 나를 통해서 드러났던 것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가족이 문제요, 환자인 셈이다.”
나의 지난 삶은 마음의 텅 빈 공간을 채우려고 무던히도 애써온 나날들이다. 하지만 이 공허감은 일, 돈, 세상의 명성, 권력, 소유, 섹스 등으로는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공허감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나의 하루 일과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책을 보면서 지내고 있다. 그리고 이전보다 드라마를 많이 보고 있으며 집안 정리도 강박적으로 한다. 물론 가끔씩 찾아오는 지인들과 술을 마시기도 한다. 우리는 ‘중독’ 하면 주로 술, 약물, 섹스 등을 떠올리고, ‘강박’ 하면 손을 자주 씻거나 수건을 반듯하게 걸어놓는 행동 등을 떠올리지만 일, 쇼핑, 텔레비전/유튜브 시청, 집안 정리 등도 지나치면 중독적이고 강박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러한 중독적이고 강박적인 행동을 매일 반복하는 것일까?
그러한 행동이 기분을 전환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나 자신이 살아있는 것 같고 어떻게든 내 안의 감정을 처리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가족치료사이며 내면아이 치료 전문가인 존 브래드 쇼는『가족』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나의 문제는 우리 가족 전체의 문제가 나를 통해서 드러났던 것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가족이 문제요, 환자인 셈이다.”
가족은 우리가 태어나 처음으로 관계를 경험하는 곳이다. 우리는 가족 안에서 정서적 친밀감을 배우고 그곳에서 감정을 다루고 표현하는 방법도 배우게 된다. 우리가 어린아이 일 때는 부모가 채워주어야 할 것들이 많다. 아이가 배고프면 음식을 주어야 하고, 울면 어디가 불편한지 끊임없이 보살펴 주어야 한다. 부모로부터 무조건적인 보살핌을 받으며 절대적으로 부모를 필요로 하는 때가 바로 어린아이 시절이다. 이때 어린아이는 부모에 대한 신뢰가 생긴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는 세상을 살아가는 근간이 된다. 하지만 이때 어떠한 이유로든 부모가 자녀를 버리고 떠났거나 부모가 자녀들의 감정표현을 제대로 받아주지 못했거나 충분한 관심을 가져주지 못했을 때 그 아이는 상처를 입게 된다. 상처를 입게 되면 그 아이는 고통스럽기 때문에 이를 메우기 위해 거짓 자기를 발달시킨다. 가면을 쓰는 것이다. 이 가면은 진짜 자기가 고통스럽지 않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생존의 방어전략이다. 하지만 이런 가식의 시기가 길어질수록 진짜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며 이는 자존감의 발달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 당시 당연하고 신성시했던 가족규칙이 얼마나 병적인 환자의 규칙들이었는지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말대꾸하면 안 된다”, “아이들은 어른이 묻기 전에 말하면 안 된다” 등. 그리고 여기서의 어른은 주로 남자 성인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어른보다는 아이가 약자인 구조, 아이 중에서도 여자아이는 더 약자인 구조가 내가 살아온 대한민국 가족체계였다. 그 당시는 가족뿐만 아니라 학교시스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학생을 지도하고 교육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병리적인 환자에 해당할만한 선생님도 많았다. 살아보니, 내가 왜 나이 많은 남자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사회시스템에 반항적이 되었는지를 알게 해 준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여전히 내 안에는 순종적인 어린아이가 남아있어 아직까지도 이 규칙들을 어길 때면 불편한 감정이 올라와 편하지만은 않다. 가부장적 사회와 가부장적 양육이 내게 남긴 상흔이다. 결국 50대 후반을 살고 있는 나는 현존의 시스템을 따르지도 못하고 그 시스템을 박차고 나오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내가 아니고 가족이다. 나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사랑하고 싶다면 먼저 가족을 탐구해야 한다. 가족을 직면하는 건 고통이고 힘겨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고통스럽다고 피하기만 한다면 내면의 평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