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듣기에 대하여

Pattern recognition

by 안미정
아이의 속도에 맞춰 저의 내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르니 내 아이의 특별한 우주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머물던 행성에는 뿌리 깊게 자라나는 여러 가지 나무가 있었어요. 제가 가장 주목했던 것은 바로 아이의 “언어 나무”였습니다. 만 3세부터 1년에 걸쳐 언어치료사를 만나면서 아이의 언어 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었고 이 과정을 통해 “듣기”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거 기억나?


1년여 동안에 걸친 언어 치료의 과정을 통해 아이는 어느새 수다쟁이가 되었습니다. '이게 뭐야, 저건 뭐야' 하며 시시콜콜한 질문들을 통해 자신의 우주를 넓혀 갔습니다. 때로는 쉽게 때로는 힘들게 사물의 이름을 기억해내는 아이를 보며 저는 마냥 경이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제게 물었어요.


"엄마, 그거 기억나?"

"응 뭐?"

"그 긴 까까."

"기다란 거? 글쎄 그게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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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아이에게 단과자를 잘 주지 않았던 터라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거 있잖아. 긴 거."

"긴 거? 조금 더 자세히 말해봐."

"음.. 길어. 이만큼."

"빼빼로인가? 혹시 초콜릿이 묻었어?"

"아니. 그냥 긴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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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울고 싶다.. 도대체 뭐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이의 아빠가 귀가했습니다.


"아빠~"

하고 쪼르륵 달려 나간 아들은 열심히 아빠에게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아빠, 나 그 긴 까까 먹고 싶어."

"긴 거?"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아빠는 곧

"아 그 롤리폴리? 우리 노아네에서 먹은 그 기다랗고 통통한 과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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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원하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린 아빠. 대단하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제가 없는 동안 아이와 아빠는 동네 이웃을 방문했고, 아이는 그곳에서 "롤리폴리"라는 과자를 맛본 것입니다. 제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던 그 이름 롤리폴리. 저는 이 사건을 통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열심히 듣기만 한다고 해서 아이의 마음을 다 알아차릴 수는 없구나.'

'함께 겪어보지 않은 일을 말로 전달할 때, 혹은 함께 겪어보지 않은 일을 들을 때 오해가 생길 수 있구나.'




진짜로 들은 후에는 적절한 반응이 따른다


"음악 듣기"는 어떨까요? 역시나 열심히 듣기만 한다고 해서 창작자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고, 또 같은 시공간에 머물며 같은 음악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입니다. 시간이 흐른 뒤 누군가가 "그때 그 음악 기억나?" 하고 당신에게 묻는다면 어떤 반응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추수감사절의 기억


미국의 큰 명절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Thanksgiving)에는 온 가족이 모여 감사한 일을 나누고 칠면조를 구워 먹는 풍습이 있습니다. 일가친척들이 모두 한국에 머무르고 있는 저희 가족은 잘 알고 지냈던 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놀러 갔다가 때마침 개봉한 겨울왕국 2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관람 후, 주인공 엘사를 부르는 네 음의 멜로디(G-F#-G-E)에 우리 모두가 매료되었죠.


멜로디 듣기: https://www.youtube.com/watch?v=lfBhmFzH2Uc (04:06 초부터)


그 멜로디는 영화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며 여러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왔기 때문에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관의 화장실에서도 로비에서도 사람들은 모두 그 멜로디를 흥얼거렸지요. 지인 가족과 저희 가족은 영화 소감을 공유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만 5세 두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입을 모아 영화의 높은 완성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죠.


모두: 1편 보다 더 좋았다. 음악이 아름다웠다. 나를 너무 많이 울렸다. 감동적이었다.


추수감사절 음식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러 두 가족이 식탁에 모여 앉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어제 관람했던 겨울왕국 2 영화가 다시 이야깃거리로 등장했습니다. 그때 불쑥,


그 멜로디가 뭐였지? 벌써 까먹었네
미정 씨가 음악 전공을 했으니 기억하려나?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네. 그럼요. 기억하다마다요.' 하고 네 음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니 모두가 '우와' 하며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허허. 쑥스럽더군요. 그러다 문득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멜로디를 어떻게 기억한 것일까요? 골똘히 생각해 보니 하루 전 영화에서 처음 그 멜로디를 들었을 때 저는 본의 아니게 멜로디를 '분석, 입력, 반복'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나: 이 멜로디는 G로 시작해서 처음은 단 2도가 내려가고 다시 G로 돌아와서 두 번째는 단 3도가 내려가네? 엘사만이 이 멜로디를 들을 수 있군. 또 나오네?


영화를 같이 관람한 모두가 엘사만이 이 멜로디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파악했고, 여러 장면에 걸쳐 멜로디가 반복되었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오직 저만이 생각해 본 것은 단 하나의 과정, 즉 '멜로디를 패턴으로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까먹거나 기억하거나, 예측하기는 힘들었지만 어쨌든 이 둘 중 하나의 반응이 나타난 이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저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패턴 읽기'라는 과정이 학습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이 모든 과정이 기억력(Memory)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죠.




패턴 읽기


이 '패턴 읽기'라는 과정은 제가 미국에 와서 새롭게 접한 영유아 음악교육 방법인 '코다이 방법론'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입니다. 헝가리 출신의 음악교육개혁가였던 졸단 코다이(Zoltán Kodály, 1882-1967)가 전인적 음악가 양성을 위해 고안한 이 방법은 코다이의 음악 철학을 바탕으로 후대 학자들에 의하여 더욱 공고히 확립되었습니다. 코다이는 각 나라별 고유 민속음악(Folk songs)을 통해 언어 습득 법과 유사한 음악교육을 실행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즉, 쉽고 익숙한 민속음악 안에 음악의 기본 요소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에 노래를 불러서 멜로디를 학습한 후 그 멜로디 안에 들어있는 음악 요소들을 패턴으로 분류하여 가르치게 되면 누구나 쉽고 깊이 있게 음악을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이죠.



코다이 방법론


그렇다면 이 코다이 방법론에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패턴 읽기에 다가갈까요?


노래하라 (Sing)

“If we ourselves sing often, this provides a deep experience of happiness in music."
- Kodály, 1964


코다이는 악기를 연주하는 기술을 접하기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는 목소리를 통해 기본적인 음악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음악교육의 최선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는 어린아이의 언어 습득 과정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태아는 뱃속에서부터 보호자의 목소리를 통해 처음으로 언어를 접하게 됩니다. 이 아이는 태어나고 자라면서 주위의 들려오는 소리들을 따라 반복적인 학습을 하게 되고 결국 말하기를 터득하게 되죠. 읽기와 쓰기는 그 이후에 소개됩니다. 코다이는 음악교육 또한 이러한 과정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는 선행활동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음악을 읽고 쓰는 과정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확신했죠.


미국에서는 이러한 순서의 음악교육 접근방식을 과정을 Sound to Symbol approach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악기교육을 위해 사용해 온 전통적인 방법, 즉 기호를 암기하고 악보를 읽은 후 악기를 연주하는 방식을 Symbol to Sound approach라고 분류합니다.


무엇을 노래 하나요? 민속 음악 (Folk songs)

“The compositions of every country, if original, are based on the songs of its own people. That is why their folk songs must be constantly sung, observed, and studied.” -Kodály, 1964


교육학자이자 작곡가였던 코다이는 자신의 믿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모국어로 오랜 시간 구전돼 온 민속 음악을 모았습니다. 한 평생을 통하여 방대한 양의 민속음악을 모아들인 코다이는 그 선율들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자주 사용되는 음악적 요소와 패턴을 찾아내었고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음악교육 교과 과정(Pedagogical Sequencing) 개발에 전념하였죠. 한 예로, 겨울 왕국 2에 나오는 멜로디(G-F#-G-E)는 단 3도 음정(G-E)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코다이 교수법에서 '솔-미'라고 소개하는 첫 번째 멜로디 패턴입니다. 일명 스킵(Skip)이라는 별명이 있고 민속 음악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됩니다.


또한 코다이는 연구를 통해 민속 음악에 '엄마의 말(Mother Tongue)', 즉 모국어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코다이 방법론에서는 민속 음악을 통해 어린 음악가들에게 음악이라는 제3의 언어를 소개하고 친근하게 하는 것에 그 목표를 두고 있죠. 코다이 방법론을 통해 아이들은 익숙한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하며 듣기-따라 부르기-움직이기의 순서로 학습(Internalization)을 합니다. 민속 음악의 친숙하고 정겨운 선율은 어린 학생들의 흥미를 이끌어내고 집중도를 높인다는 장점 또한 가지고 있죠.


어떤 학습도구를 사용하나요? 이동 도법 솔페이지 (Movable-do solfège)


계명 창법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이 방법에서는 계명들(도, 레, 미, 파, 솔, 라, 시)이 조성 내에서 갖는 기능적인 면과 두 계명 사이의 음 간격만을 나타내며 절대음(Absolute pitch)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G major에서 G라는 음을 절대음인 G로 읽지 않고 DO(도)라고 읽음으로써 으뜸음의 기능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코다이는 이 도구가 조성 기능(Tonal function)을 파악하는데 용이하며 이는 초견 능력(Sight-singing) 향상에 기여한다고 믿었습니다.



느린 배움 VS 빠른 배움


앞서 소개한 듯이 코다이 방법론의 최고 장점은 어린아이들의 나이에 걸맞은(Child-developmental approach) 교육 접근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음악의 기본 3요소인 리듬, 멜로디, 화성을 소개함에 있어 가장 사용 빈도가 높은 패턴을 우선적으로 다루며 익숙하고 친근한 민속음악을 통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목소리로 학습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코다이 방법론은 Sound to Symbol approach의 일환으로 느린 배움을 추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느린 배움이란 학습한 것을 꼭꼭 씹어먹고 되새김질하여 내 몸의 영양분으로 만드는 과정을 말합니다. 느리다는 시간의 개념은 학습한 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익혀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을 통틀어 말합니다. (느릿느릿 늑장을 부리는 의미와는 차이가 있죠.) 이 과정을 통해서 학습자는 학습 대상을 일정한 패턴으로 기억하게 되며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으로 음악을 학습하게 되는 경우, 음악의 본질인 반복된 패턴이 부각되게 되고 학습자는 학습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기 쉬워집니다. 더 나아가 학습자에 의해 한 번 소화된 연주, 즉 의미 있는 선율로 재탄생한 음악이 청자에게 충분히 잘 전달된 경우 그들로부터 음악에 대한 의미 있는 반응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반대되는 개념인 빠른 배움은 학습한 것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여 몸의 영양분이 되지 못하고 배출되어버리는 과정일 것입니다. 이 경우, 즉 듣기와 말하기 훈련 없이 기호 암기 후 악보를 읽어 내려가는 악기교육 방식의 경우, 음악의 본질인 아름다운 연주에서 벗어나 기계적 연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눈은 처음 마주하는 악보를 보아야 하고, 손은 악기를 연주해야 하며, 그 와중에 바른 자세 또한 유지해야 하는 동시 다발적 멀티 플레이(초견을 기반으로 한 연주)를 통해서는 음악에 담긴 의미 있는 소리들을 단번에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음과 음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음이 갖는 조성적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며, 노래를 통한 선행학습(Internalization) 없이 행해지는 이 연주 방법은 무의미하고 기계적인 음악으로 다가옵니다. 따라서 의미 있는 청자의 반응을 기대하기 힘들게 되죠.




'Symbol to Sound approach(악보를 읽고 반응하여 연주한다)'라는 일방적 방향의 음악교육으로 점철된 한국의 음악교육에도 'Sound to Symbol approach(음악을 먼저 듣고 이해한 후 연주한다)'라는 음악교육의 새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봅니다. 후자의 좋은 예 중 하나인 코다이의 음악교육 및 악기교육 커리큘럼이 한국에 올바른 방향으로 소개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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