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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미정 Jul 14. 2023

우리 꽃봉오리

미주 한국일보 <여성의 창> 기고 6

앞마당에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오랜 시간 장미 나무에 매달려 있는 꽃봉오리 하나가 있다. 지난 한 주 동안 이 봉오리에서 언제 꽃이 필지 궁금한 마음에 자주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다가 이 봉오리가 뭣 때문에 저렇게 뜸을 들이는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고 곧이어 얄미워졌다. 별꼴이었다.


어느 날은 너무 멀리서만 바라봤나 싶어 작정을 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얼굴을 들이밀고 가시 사이로 손을 뻗어 단단히 닫힌 꽃봉오리를 확인했다. 그러고 나니 멀쩡한 것이 왜 때를 모를까 싶어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무엇이 이 꽃봉오리를 머뭇거리게 했을지 생각하니 조금 슬퍼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던 유행가의 가사를 증명하듯 온갖 감정들이 솟아났다.


더 자라지 못하고 주저하는 것, 그게 비단 꽃봉오리뿐일까? 누군가 나에게 그런 것을 더 꼽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자기애(自己愛)를 말할 것이다. 이 사람 없이는 도저히 못 살겠다 싶은 남편을 만나 결혼한 후 더 크게 부풀 것만 같았던 자기애는 어느 순간 멈췄다. 그 순간을 헤아려 보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냐고 이제껏 미뤄왔는데 굳게 닫힌 꽃봉오리를 보니 살펴볼 용기가 났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이 꽃봉오리처럼 철이 지나도록 피지 못할 것 같았다.


주저함의 순간은 내가 나이기를 유지하는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때였다. 나의 행복만을 위했던 삶의 방향성이 남편의 행복을 향해야 했고, 아이와 함께 우리의 행복을 향해야 했을 때 말이다. 아침을 맞이하는 때는 내가 눈뜨고 싶을 때가 아니라 남편이 출근할 때 혹은 아이가 학교 갈 때가 되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는 내가 피곤할 때가 아니라 남편과 아이의 일과가 끝났을 때가 되는 것. 즐겨 마시던 커피가 사치품이 되고, 내 취미 생활이 금기시되는 동안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더 이상 자랄 수 없었다.

‘엄마, 도시락 쌌어?’ 때마침 아들이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껍질을 깎으려고 물에 담가 둔 당근이 떠올랐다. 냉장고 야채칸에 너무 오래 있어서 오늘은 반드시 먹어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는데 홀랑 까먹은 것이다. 이런 사색은 아무래도 무리라며 서둘러 주방으로 돌아와 당근을 깎았다. 아무리 힘주어 껍질을 깎아도 헛질만 하게 되자 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칼이 잘못됐나?’ 그런데 불쑥 남편이 와서 그런다. ‘아니, 당근이 잘못했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남편도 같이 웃었는데 내가 웃는 건지 남편이 웃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건 우리가 함께 웃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의 자기애는 남편의 것과 만나 더 큰 무언가로 업그레이드된 것일지도.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활짝 피는 웃음꽃을 보면 말이다.


꽃잎을 앙다문 우리 꽃봉오리


미주 한국일보 기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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