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국일보 <여성의 창> 기고 5
한때 아들의 자랑은 눈감고 OO 하기였다. 눈감고 한글 쓰기, 눈감고 신발 끈 묶기 등등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눈을 감는다고는 하지만 실눈을 뜬 뒤 애써 안 본 척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또 어린이다움 덕분에 뿜어져 나오는 그 순수함이 참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 감고 OO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한 개인의 ‘성장’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바라보기 좋았다.
문제는 눈감고 OO 하기가 ‘눈 가리고 아웅 하기’로 변했을 때다. ‘다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을 하다’는 뜻을 가진 이 속담이 경고하는 바는 익숙함의 역기능, 즉 성장의 멈춤이 아닐까 싶다. 내 아이는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미국땅에서 자라며 이중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조부모님과의 대화 중 예의를 차려야 할 때면 ‘나는 한국말을 잘 못하니까’라는 핑계를 둘러댄다. 눈감고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만큼 존댓말에 대해 반복해서 설명해 주었는데도 아이는 매번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짧은 존댓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나는 매번 화가 난다.
내가 아이에게 화가 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지 그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음악 경연대회에 나갔는데 불편한 옷을 입고, 낯선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이 싫어서 나 몰라라 도망가려 했었다. 그러나 경연장에선 내 옷에 뾰족한 핀으로 번호표를 꽂아 놓은 뒤 도망갈 틈을 주지 않았고, 내 연주 차례에는 이름대신 번호가 불렸다. 당시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무대로 걸어 나가 피아노 의자에는 앉았으나 결국 첫 음을 찾지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연주할 수 있는 만발의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 뒤 나는 그 누구보다 나에게 혹독한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고 있다’는 그 마음이 완벽을 갈망하는 나를 무너뜨리기도 했지만 때론 내 삶에 찾아오는 불편함과 낯섦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의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사실 일찍 피아니스트의 길에 들어선 나에겐 눈감고 연주하기는 자랑이라기 보단 삶의 기본값이다. 덜 익은 연주를 알아챈 청중에게 ‘눈 가리고 아웅 하기’식 변명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내가 아이에게 화가 난 이유가 분명해졌다. 나는 ‘원래 못해’라는 마음을 품고 의도적으로 성장을 멈춘 아이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노력의 기준을 내 맘대로 세워 놓고 그 잣대를 휘두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아야겠지만 자라나는 아이가 이것만은 기억하고 실천했으면 좋겠다.
나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한 책임감이라는 것을. 그러니 성장하는 것을 멈추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