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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자연인 Oct 18. 2022

제주 한 달 살이 1

제주 숙소에 도착해 2층 현관문을 열자 녹슨 철문에서 끼익 소리가 났다. 순간 할머니 집 문에서 나던 소리가 뇌리에 스쳐 소름이 끼쳤다. 잃었던 물건을 수십 년 만에 찾은 기분이 그러할 것이다. 길가다 제목을 잊어버렸던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가사 몇 마디를 듣고 기억했다 검색해서 그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넣어 자주 듣는다거나, 잠깐 흘리듯 맡은 냄새로 옛 기억에 곤히 잠긴 기억 또한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제주에 있는 내내 분명 나의 가족을 대견해했을 할머니의 땅과 바다에서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육아휴직을 시작하면서 제주 한 달 살기는 꼭 해야겠다고 계획했었다. 짧은 여행이 아닌 일정한 주거지를 가지고 느릿느릿 시나브로 사색할 수 있는 머무르기를 하고 싶었다. 딸아이가 잠자리가 바뀌어도 제법 잘 자고 이유식도 시작했던 터라 8월 중순은 제주로 갈 수 있는 좋은 시기였다.


하지만 내 몸상태가 안 좋았다. 가족 중 내가 마지막으로 감기에 걸려 출발 전 주사를 맞고 약도 먹었지만 제주에서 첫 며칠 동안은 목이 아프고 가래가 끓었다. 기침이 멈추자 이삼일을 쉬지 않고 낮이건 밤이건 딸꾹질을 해댔다. 평생 할 딸꾹질을 몰아서 했을까. 그렇게 제주살이는 시작되었다.


아내가 운 좋게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바닷가를 바라볼 수 있는 물빛 좋은 협재해수욕장 인근의 단독주택을 빌렸다. 조그마한 잔디마당이 있는 이층 집이었는데 다행히 일층에 사람이 없어 층간소음 걱정 없이 아들이 뛰어다녀도 제지하지 않았다.


한 달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아침에 일어나 밥을 간단히 먹고 걸어서 이삼 분 거리에서 있는 선착장 옆 작은 모래 해변에서 네 식구가 바다수영을 자주 즐겼다. 챙겨간 튜브로 아내와 아들, 딸이  두둥실 떠다녔다. 물을 무서워하던 아들도 이번을 계기로 물놀이를 제법 좋아하게 된 것이 나름의 큰 성과였다.


집 앞바다는 온통 에메랄드 빛이었다. 물안경을 쓰고 잠수를 즐기면서 그 이유를 생각해봤다. 그것은 바로 모래 때문이었다. 발로 비벼도 크게 흐려지지 않는 질 좋은 모래가 아래에 위치하면 바다는 에메랄드 빛이었다. 게다가 물도 탁하지 않아 가시거리가 충분히 확보되니 잠수가 무섭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수영을 마치고 돌아와 씻고 아내는 막내를 재우고 아들이 방해가 되지 않게 나와 아들은 근처 드라이브를 가곤 했다. 근처 한경도서관에서 책도 빌렸다. 나는 최재천 교수의 책과 간단한 에세이 한 두 권을 읽었고 아들은 중장비를 좋아해서 중장비 사진으로 가득 찬 책들을 좋아했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펼쳐서 보고 귀찮게 질문도 많이 했다.


저녁을 먹고 이층 마당으로 나와 캠핑용 릴랙스 체어를 펼치고 잔잔한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내 책을 읽고 아들은 제 책을 읽었다. 시원한 밤공기에 취해 한가롭고 평화롭게 갈치잡이 배들과 달을 바라보며 아들과 나란히 책을 읽었다. 얼굴과 머리를 어루만지듯 스친 달콤한 바람이 그립다.


한 달은 길기도 했고 짧기도 했다. 협재해수욕장과 금능해수욕장 일대가 우리 동네처럼 익숙해져서 눈을 감으면 여기저기 자세히 생각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아파트에서는 근심이 많다. 아내는 그렇게 말했다. 네이버 맘 카페에 들어가지 않아서 좋았고 당분간 고립되어서 모든 관계가 단절되니 스트레스받지 않아서 좋았다고. 오로지 오늘은 무엇을 먹고, 아이들에게 어떤 좋은 곳을 구경시켜줄 것인지만 생각했다. 벌써 제주가 그립다. 돈이 넉넉하면 몇 달 더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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