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터질 듯 터질 듯 아슬아슬하면서도 평온한 날들이 흘러갔다. 중2가 되면 당연하게 중2병에 걸려 혼란스럽고 뭔가 대단한 사건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나도 친구들도 별일 없이 지내고 있었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질병관리밴드’ 활동마저 그럴듯한 진전도 없고, 중2병에 대한 호기심마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번 주 동아리 활동의 주제는 ‘변화’였다. 모든 연구의 시작은 본질을 아는 것이라는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변화라는 낱말의 뜻을 찾아보았다. ‘사물의 성질, 모양, 상태 따위가 바뀌어 달라짐’이라고 풀이되어 있었다. 선생님은 ‘왜, 무엇을, 어떻게’를 항상 생각하라고도 했다. 무엇이 왜 달라졌을까, 어떻게 달라졌을까……. 나는 성질, 모양, 상태,라고 초록색 형광펜으로 쓰고 보라, 빨강, 노란 물고기 스티커로 장식하며 다꾸를 했다.
동아리 모임에 가면서 하늘은 왜 파랗고, 꽃은 왜 피었다가 지는지 생각하는데 동준이 럭비공을 툭툭 차며 걸어가고 있었다. 양동준에게 왜 항상 럭비공을 차며 다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커다란 스크린에는 여전히 아이들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변한 게 없는데 어느새 중2라는 틀에 갇혀버렸어. 난 초등학생일 때도 반찬 투정했거든. 그런데 엄마는 너 중2병이라 반찬 투정하는구나, 하며 날 환자 취급했어.
-어떤 행동을 해도 난 이미 중2병 환자야. 그게 이해하려는 마음이 아니고, 넌 환자니까, 하며 포기하는 느낌이야.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을 들었어. 어느 교수님이 중2를 그렇게 설명했대. 모든 사람에겐 평생에 걸쳐 발산해야 하는 지랄의 양이 정해져 있다는 거지. 그게 반항으로 터져 나오는 최초의 시기가 중2이고, 고등학생이나 어른이 되어서도 지랄을 떨 수 있다는 이론이야. 그런데 지랄은 적당한 시기에 발산하는 게 건강한 거래. 늦지랄이 더 무섭대. 그래서 난 중2에 최선을 다하여 지랄을 떨 거야. 총량을 일찌감치 털어버리고 착하고 건강하게 살 작정이야.
-그렇다면 지랄은 중2의 특권이네. 교수님도 인정한 특권.
-어른이 되어서도 지랄을? 어른이란 청소년기를 거쳐 완성된 인간이 되는 거잖아, 그런데 어른이 지랄을 떤다는 거야? 그렇다면 그건 무슨 병이야? 지랄병?
총량을 빨리 털어버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지랄을 떨겠다는 의견에 다들 박수를 보내며 응원했다. 중2병을 대상으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반찬 투정 같은 사소한 행위마저 중2병이라는 틀에 갇혀 버린다는 사실에도 다들 공감했다.
모임이 끝나고 선생님은 환유, 다혜, 동준, 그리고 나에게 뒷정리를 부탁했다. ‘청소년 마음연구소’에서 지원한 간식인 빵과 음료수를 먹고 난 자리가 지저분했다. 지난 모임 때도 그랬는데, 불만까지는 아니지만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난 바빠서 먼저 갈게.”
우리 대답은 들어보지도 않고 다혜는 이미 가방을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난 황당해서 바라보기만 했다. 얄미웠다. 다혜는 지난번에도 그렇고, 항상 그랬다. 수업 이외에 청소나 조별 과제 등을 할 때마다 바쁘다며 늘 먼저 자리를 떴다.
“이다혜, 넌 학원도 안 다닌다면서 뭔 일이 그렇게 많으냐? 나도 엄청 바쁜 사람이거든!”
양동준이 평소처럼 공을 툭툭 차며 빈정대듯 말했다. 순간 다혜가 뒤돌아보았고, 늘 어디로 튈지 몰라 아슬아슬하던 럭비공이 직선을 그으며 빠르게 날아갔다. 아직 교실에 남아 있던 아이들 모두가 공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실수인지 고의인지는 모르겠으나 ‘양동준, 언젠간 너 사고 한번 칠 줄 알았지.’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럭비공에 정면으로 얼굴을 맞은 다혜는 공을 잡아서 동준에게 다시 던졌다. 동준이 재빠르게 피하자 럭비공은 창가에 있던 천일홍 화분을 쓰러뜨렸다. 화분은 그 아래 바닥에 놓여 있던 박원재 가방 위로 떨어지며 흙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화분은 산산조각이 났다.
반에서 가장 덩치가 작은 원재가 매달리듯 동준의 멱살을 잡았다. 대롱대롱 매달린 듯한 원재가 안쓰러워 보였다. 동준은 원재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넘어지며 밑에 깔린 건 오히려 동준이었다. 원재는 움직임이 날쌘돌이 같았다. 어느새 동준의 배 위에 올라타고 앉아 주먹을 높이 쳐들었다. 하지만 곧 주먹을 내리고 손으로 옷자락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데에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환유는 원재의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깨진 화분 조각과 흙모래를 빗자루로 쓸어 담았다. 이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던 다혜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가버렸다. 원재도 한 마디만 툭 던지고 사라졌다.
“미친 새끼!”
“집에 가다 확 꼬꾸라져 버려라, 저 싸가지…….”
동준은 다혜에게 인지, 원재에게 인지 모를 욕을 내뱉으며 뒤를 따라갔다. 나는 사건의 시작인 럭비공을 교탁 밑 비어있는 공간에 처박았다.
‘이 럭비공, 절대로 돌려주지 않을 거야.’
조금 전 중2병에 대하여 진지하게 토론하던 아이들과 지금 이 엉망진창인 아이들이 같은 사람인 게 맞나,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중2병 바이러스가 빠르게 번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기세로 앞으로 2학년 2반 모두가 감염되고, 이어서 2학년 전체가 확진자가 된다면…….
우물쭈물하다가 내가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오게 되었다. 나는 복도 쪽 창문을 닫고 전등까지 꼼꼼하게 끄고 밖으로 나왔다. 찝찝한 기분 이대로 집으로 가기 싫었다. 그래서 유리가 배구를 하고 있을 체육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스파이크라도 한 방 시원하게 날리는 걸 보면 풀릴 것 같았다.
배구부 아이들은 여러 개의 공을 서로 주고받으며 연습하고 있었다. 유리는 노란 운동복을 입고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오가며 서브와 토스를 번갈아서 했다. 유리의 왕자님은 바로 옆에서 주로 스파이크를 했다.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폰이 없었다. 호주머니에도 없고 가방의 지퍼마다 다 열고 뒤져봐도 없었다. 가방을 거꾸로 들어서 흔들었다. 아……, 진동으로 해서 책상 서랍에 넣어놓은 것이 생각났다.
100m 달리기 하듯 교실을 향하여 뛰었다. 훤한 대낮인데도 햇볕이 잘 들지 않는 복도는 어둑했다. 내가 뛰면서 내는 발걸음 소리가 복도 끝에 부딪혀 반대편 끝까지 울려 퍼졌다. 그 울림을 뚫고 희미하게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왔다.
머뭇거리며 교실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는 순간, 검은 옷에 검은 모자와 검은 마스크를 한 온통 블랙인 사람이 툭 튀어나왔다. 난 너무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블랙이 내 어깨를 스치고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다다다다다닥……, 점점 멀어져 갔다. 블랙이 지나간 자리에서 달콤하고 쌉싸름한 민트향이 났다. 아울러 검은 모자와 마스크 사이에서 반짝이던 금테 안경의 잔상이 서늘하게 남았다.
나는 너무 놀라 ‘얼음 땡’ 게임에서 얼음이 된 상태로 굳어 버렸다. 내 영혼이 정수리 숨골을 통하여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요즘 학교에 돌고 있는 괴담이 떠올랐다. 해 질 녘이면 하모니카 연주가 희미하게 들려오는데, 그 음악에 홀려 따라갔다가는 영혼을 빼앗기고 마음이 너덜너덜해진다는 괴담이었다. 그때, 부르르 떨리는 진동이 빈 교실의 공기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그 소리에 나는 간신히 땡이 되어 책상 서랍에서 폰을 찾을 수 있었다. 진동은 유리가 보낸 톡이었다.
-어디 갔어? 빨리 와.
내가 꼼꼼하게 전등을 끄고 나간 기억이 분명한데 교실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나는 전등 스위치도 끄지 못한 채 달리기 시작했다. 블랙이 쫓아올 것 같아 숨을 헐떡이며 빛의 속도를 따라잡을 것처럼 뛰었다. 내가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다니, 정수리가 터질 것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마침내 체육관 앞에 서 있는 유리를 보자마자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날 밤, 나는 블랙에게 쫓기다가 어느새 내가 블랙을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 내 영혼을 돌려받아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블랙은 보이지 않고 천천히, 너무 낮고 느려서 괴랄한 느낌마저 드는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는아직도중2♬태어날때부터사춘기♬
정7각형선을밟고♬영원히성장이멈췄지♬
귓불 주위로 악마의 숨결이 느껴져서 온몸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도망, 빨리 도망가야 하는데 한 걸음도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피비에게 편지를 쓸 수도 없었다. 두렵고 안타까워서 엉엉 우는데, 꿈에서 깨어나면서도 울음이 그치지 않아 계속 울고 있었다. 아빠, 엄마가 놀라서 달려와 껴안으며 달래려는데 블랙인 줄 알고 있는 힘을 다해 밀어냈다. 엄마가 침대 밑으로 나동그라져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4
피비야,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아닥친다는 말은 맞는 것 같아. 블랙 탓에 싱숭생숭, 울다 깨다 잠드는데 다시 이어지는 꿈이야. 그런데 선생님이 번개를 치네.
-얘들아, 빙수 사 줄게 나오너라~
-wow! 곧 달려갑니다. ㅋㅋ
-앗싸! ㅎㅎ
온갖 이모티콘이 등장하고 개방정, 오두방정이 장난 아니야. 단톡방이 매우 매우 바빠지고 있어.
-전 빙수값 계좌이체로 보내주세요. 여기는 발리, 두구두구두구~ ㅋㅋ
이어서 선생님에게서 개톡이 와서 다이어리를 누구에게 보여준 적 있느냐고 묻는 거야. 이건 또 무슨 날벼락?
-아니요, 그런 적 없어요.
-사물함에 넣어놓은 적은?
-항상 가지고 다녔어요.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해.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공연히 주눅이 들어.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얹힌 것 같아. 아이들은 팥, 수박, 망고 빙수 등을 주문하느라 어수선해.
만나자고 한 건, 박사 논문 때문이야. 내 프로젝트를 누군가 똑같이 모방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 말한 건 괜찮은데 혹시 녹음한 사람 있어?
모두 그런 적 없다고 당당하게 대답해. 마음 탓일까, 양동이가 나를 째려보는 것 같아. 아이들 시선도 모두 나를 향하고 있어. 나는 잘못한 일도 없이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듯. 아이들은 의심을 털어버릴 수 없는 눈치야. 피비야, 난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어. 내 몫으로 놓인 빙수가 천천히 녹아내리고, 봉우리처럼 봉긋한 딸기가 얼음물에 잠겨가.
그런데 빙수 그릇 옆에 펼쳐놓은 선생님 수첩은, 이건 뭐지? 함부로 흘려 쓴 메모에 눈길을 확 사로잡는 글씨가 있어. ‘나곡동19’ 선생님의 논문을 모방하고 있다는 사람과 저 주소가 무슨 관계가 있을 것 같아. 근건 없으나 확실한 느낌적인 느낌이야. 왼쪽 새끼발가락이 마구마구 꼼지락대. 내 예감, 식스센스가 틀림없어. ‘나곡동19’ 그다음은 선생님의 폰이 놓여 있어서 볼 수가 없어. 피비야, 나는 나머지 주소를 보고 싶어 조바심이 나서 미치는 중.
선생님이 바쁘다며 수첩을 들고 먼저 자리를 떠. 아이들도 하나둘 돌아가는데 나는 ‘나곡동19’에 꽂혀서 멍때리고 있어. 정신을 차려보니 환유, 다혜, 양동이만 남아 있네.
설주야, 아니면 됐지, 왜 그래? 소심하긴.
논문 모방한다는 그 사람, 나곡동19에 있을 것 같아.
나곡동?
양동이가 재빠르게 나곡동을 검색해.
전국에 나곡동은 한 군데뿐인 것 같아. 운주역 근처야.
나곡동19, 논문 모방, 녹음……, 뭔가 그림이 그려지지 않니?
생각이 날 듯 날 듯 떠오르지 않아. 앞 테이블에서 빙수 쟁반을 내려놓는 남자의 금색 안경테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갑자기 강렬한 빛이 머릿속을 갈라. 나는 테이블을 세게 치며 벌떡 일어나. 그 바람에 빙수가 녹은 물이 유리그릇 안에서 출렁.
아, 깜짝이야, 설주야, 왜 그래?
브, 블랙, 그 사람이 녹, 녹…….
블랙이 녹음을?
교실에 녹음 장치를 하고 우리 이야기를 엿들었다는 거야?
헐, 이럴 수가.
선생님께 알려야 해.
아니, 우리가 찾아서 응징하자, 우린 할 수 있어. 김정은도 중2가 무서워서 못 쳐들어온다는데, 뭔들 못해? 우리가 블랙을 잡는 거야.
양동이는 뭔가를 계속 검색하고 있어. 야, 양동이, 빨리 검색해! 나 지금 꿈에서 깨어나려 하잖아. 헉! 피비야, 이건 뭐야, 개꿈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