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엔 학원 수업이 없어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날이다. 매주 돌아오는 날인데도 아침부터 마음이 둥실둥실 날아갈 것만 같았다. 작년처럼 언제 눈보라가 불어닥칠지 모르지만 그래도 날씨는 매일매일 조금씩 더 따뜻해졌다. 기온이 올라가니 마음도 따라 부풀어 올랐다. 과학 시간에 배운, 온도가 1도 올라갈 때마다 부피가 273분의 1씩 증가한다는 샤를의 법칙 때문일까. 요즘 내 마음이 자꾸 풍선처럼 가벼워지는 것도 날씨가 따뜻해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마음의 부피, 질량, 무게는 어떤 단위로 표시할까, mg, kg, cc, ml, cm³. 아침부터 뒹굴뒹굴하며 쓸데없는 상상을 하느라 아침밥도 못 먹고 달려야만 했다. 아무리 급해도 정7각형의 선은 절대로 밟을 수 없었다. 은색 선을 요리조리 피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학교에 도착했다.
요즘 유리의 배구부는 토요일은 물론 수요일 방과 후에도 모인다고 했다. 몇몇은 단순한 동아리 활동을 넘어 전문적인 훈련을 받는 것 같았다. 유리는 점심을 후다닥 먹어 치우고 배구 연습한다며 체육관으로 달려가곤 했다.
지난가을부터 유리는 키가 쑥쑥 자라났다. 겨울방학이 지나고 중2가 되면서 유리는 이미 172cm나 되었다. 나는 아직 평균 키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172cm라니! 오늘 보니 밤새 또 자란 것 같았다. 발목까지 오던 바지가 종아리 근처까지 껑충 올라가고, 교복 셔츠도 요즘 유행하는 크롭, 소매는 7부가 되었다. 유리는 물만 마셔도 자란다고 했다. 마치 ‘잭과 콩나무’에 등장하는 창가의 나무처럼.
유리는 수업이 끝나면 배구부 훈련하는 걸 보러 오라고 했다. 그리고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면서 실실 웃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입꼬리가 저절로 옆으로 벌어졌다.
나는 종례를 마치고 체육관으로 갔다. 체육관 문을 조심스럽게 열며 들어서려는데 느닷없이 공이 날아들었다. 나는 공을 피하려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피구 하냐? 본능적으로 공을 띄우는 훈련이 돼야 해. 축구처럼 발로라도 패스해 봐!”
연습하던 아이들이 내 앞을 지나서 운동장으로 우르르 달려 나갔다. 뻘쭘하게 서 있는 내 등을 선생님이 가볍게 밀었다.
“구경 왔구나. 나가, 나가서 함께 달려 봐. 운동장 세 바퀴닷!”
선생님의 명령에 나는 운동장으로 나갔다. 뛰다 보니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 바퀴는 얼떨결에 따라 뛰었다. 둘째 바퀴는 벌써 세 바퀴째를 달리는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으려 조끼까지 벗어던지고 달렸다. 그러다가 함께 운동장에 널브러져 누웠다.
얼굴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눈을 감았다. 호흡이 조금씩 잦아드는데 뭔지 모를 만족감, 이런 걸 희열이라고 하나, 운동과는 담을 쌓은 나인데도 참 좋았다. 파란 하늘엔 같은 모양의 구름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바람이 하늘을 가르며 지나가더니, 구름이 새처럼 떼 지어 날아가며 하늘을 가득 메웠다.
얇은 셔츠만 입고 누워있으니 굵은 모래알이 등에 박혀 따끔거렸다. 이 와중에도 가물가물 졸음이 몰려오는데 빨리 체육관으로 들어오라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귀찮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몸이 벌떡 일어나 달리고 있었다. 운동의 매력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와우, 최유리, 포즈 죽이는데! 리시브 그만하고 스파이크 한 방 시원하게 날려봐.”
“배구의 첫걸음은 리시브야. 받지도 못하면서 무슨 스파이크?”
“넌 세터라며? 리베로가 받고, 스파이크는 공격수가 하고, 넌 날로 먹는 거 아냐?”
“헐, 배구는 세터의 손에 달렸단다. 세터의 중요성을 조금도 모르네. 세터는 선수들의 동선과 리듬을 잘 파악하고 움직여야 하거든.”
“아무리 그래도 배구의 맛은 스파이크지!”
말은 그렇게 했으나 나는 유리가 배구에 소질이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키가 큰 데다가 공을 따라 움직이는 감각이 남달랐다. 가위바위보에 져서 배구부로 가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아나, 제2의 김연경 선수가 될는지.
가볍게 공을 튕기던 유리가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재빠르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리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헉, 저런 애가 우리 학교에? 180cm는 됨직한 키, 조막만 한 얼굴, 백마만 타면 왕자님이 될 외모였다. 유리가 왜 실실 웃으면서 날 오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 학교에 저런 애가 있어? 첨 보는데.”
“전학, 스타일 죽이지?”
나는 왕자님의 행동을 안 보는 척하면서 슬쩍슬쩍 훔쳐보았다. 왕자님의 몸짓은 공을 향하여 재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여유로워 보였다. 자신을 타인처럼 바라보며 즐길 줄 아는 것, 이런 태도가 외모에 자신 있는 아이들의 공통점 같았다. 다혜도 그렇고, 아이돌 중에도 저런 스타일이 많았다. 저런 포즈는 타고나는 걸까, 연습하는 걸까. 나도 내 얼굴에 크게 불만은 없다. 단지 발가락, 발가락도 뭐, 항상 양말과 신발을 신고 있으니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아빠와 엄마는 서운할 정도로 내 발가락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섭섭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소파 앞 테이블에 두 발을 턱 걸치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내 발가락을 쓰다듬으며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면 그건 또 더 싫다. 아니 그러면 어쩌라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내 마음,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배구 연습이 끝나고 우유를 나눠 주는데 유리가 내 몫까지 받아 왔다. 나는 유리와 둘이서 체육관 뒤 벤치에 앉았다. 아카시아의 짙은 향기가 바람결에 날아다니고 있었다. 유리는 가방에서 커피믹스를 꺼내어 우유병에 붓고 마구 흔들었다. 연한 갈색의 거품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요걸 카페라테라고 하는 거야.”
“난 커피 맛 모르겠던데, 맛있냐?”
“당연하지, 넌 아직 사랑을 모르는 아기니까.”
갑자기 흔들던 우유를 던지듯 내려놓고 유리가 달리기 시작했다.
“뭐야, 왜 그래?”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려있던 아카시아 꽃잎이 갑작스러운 바람에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뒹구는 꽃잎은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후루룩 지는 건 처음 보았다. 유리는 아까시나무 아래에서 손바닥을 높이 들고 나비가 꽃 주위를 날아다니듯 돌아다녔다. 떨어지던 꽃잎 하나가 살포시 유리의 손바닥 위로 얹어졌다. 유리는 꽃잎을 놓칠세라 조심스럽게 다가와 손바닥 위의 꽃잎을 보여주었다.
“성공!”
“성공? 뭘?”
“아카시아 꽃잎이 떨어지는 걸 억지로 움켜잡으면 안 되고, 손바닥을 쫙 펴서 자연스럽게 받아야 해. 그래야 사랑이 이루어져.”
“뭔 소리야, 누가 그래?”
“수억만 년 전부터 내려오는 전설인데, 몰랐어?”
“흥, 사랑하는 사람은 있고?”
“아까 봤잖아, 배구남. 운명은 내가 배구남을 만나도록 이미 정해져 있던 거야. 내가 가위바위보에 져서 배구부로 오게 된 것부터가 운명이라고!”
유리는 책갈피에 꽃잎을 잘 펴서 넣고 책장을 덮은 다음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책갈피에 나의 사랑을 꼭꼭 숨겨놨어. 이젠 배구남의 영혼이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아카시아 꽃말이 숨겨둔 사랑이거든.”
“사귈 거야?”
“아직은 아냐. 그러나 이제 꽃잎을 몰래 숨겨놓았으니 배구남이 곧 고백하게 될 거야.”
유리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반쯤 감고 꽃잎이 든 책을 꼭 끌어안았다. 다시 바람이 휭 불자 꽃잎이 함박눈처럼 후드득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나도 벌떡 일어나 꽃잎을 받으려고 뛰어갔다. 보기보다 쉽지 않았다. 손바닥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놓듯이 받는 건 발가락 때문에, 아니 바람 때문에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나는 잘되지 않는 모든 일은 다 발가락 탓을 하곤 했다.
수많은 꽃잎이 내 손끝을 스치고 땅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나도 유리처럼 허공으로 손을 높이 쳐들고 지는 꽃잎을 겨우 한 장 받았다. 꽃잎을 받고 보니 뜬금없이 사랑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손바닥이 간지럽더니 이어서 마음도 간질간질해졌다. 사랑은 어떻게 오는 걸까, 꽃잎처럼 이렇게 폴폴 떨어져 내리는 걸까.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서로 비밀이 없어야 할 텐데……. 나는 아직 오지도 않은 사랑을 꿈꾸며 발가락 걱정부터 했다. 내가 받은 꽃잎을 보여주자 유리는 깔깔 웃어대며 좋아했다.
“병은 병이네, 중2병이 전염병 맞는가 보네. 중2병의 대표적 증세가 트리플 허! 허풍, 허세, 허언이라고 하더니, 드디어 감염됐네.”
올해의 아카시아 꽃잎을 본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날 밤, 으스스한 비바람이 거세게 창문을 두드렸다. 역시 계절은 그냥 가고 오는 게 아니었다. 나른한 샛바람에 깜박 속아 몸과 마음이 마냥 풀어헤쳐졌다가 화들짝 놀라서 다시 오그라들었다.
이어지는 천둥소리에 놀라 나는 펭귄을 꼭 끌어안았다. 펭귄이 애착 인형이 된 후에야 나는 펭귄 발가락이 세 개인 걸 알게 되었다. 아주 조그만 아이였을 때부터 펭귄에게 끌리던 마음, 나는 펭귄 발가락을 하나하나 헤아리다가 잠이 들곤 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펭귄도 나처럼 발가락이 세 개여서 뒤뚱뒤뚱, 하나, 둘, 셋……, 우르르 쾅쾅, 하나, 둘, 셋…….
#3
피비야, 우르르 쾅쾅 우르르 쾅쾅, 이 소리가 들려? 꿈에서도 비바람에 떨고 있을 아카시아 꽃잎이 너무너무 걱정돼. 나는 신발도 못 신고 학교로 달려가고 있어. 와서 보니 아까시나무에는 한 무더기의 꽃만이 바람에 흔들리며 대롱대롱. 요란한 비바람에도 살아남은 꽃송이가 대견해서 토닥 토닥토닥하고 싶어. 그러나 너무 높아 손이 닿지 않아.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걸어가고 있어. 앗! 체육관에서 하모니카 소리가 흘러나와. 많이 들어본 곡인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멜로디만 입안에서 뱅뱅 맴돌아. 다가가 문틈으로 살짝 엿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아. 창문을 살짝 밀어도 꿈쩍도 안 해. 갑자기 하모니카 소리가 뚝 끊겨. 나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문 쪽으로 다가가는 중이야. 그러나 하모니카 소리를 따라가면 절대로 안 된다는 건, 피비야, 너도 알고 있지? 그건 정7각형 선을 밟는 것보다 더 위험해. 하모니카 소리를 따라가면 영혼을 탈탈 털린다는 괴담이 있잖아. 나는 뒤돌아, 뒤돌아서 달려.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영혼을 빼앗기면 어떻게 되는 걸까. 꽃잎, 하모니카, 책갈피에 숨겨둔 사랑, 정7각형의 은색 선, 연못에 빠져 죽은 여우, 빨간 휴지……. 아무래도 나는 중2병 바이러스에 감염됐나 봐. 피비야, 중2병은 정말 전염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