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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미 Aug 29. 2024

2. 질병관리밴드

  토요일, 동아리 모임 시각이 10시라 잠자리에서 뒹굴뒹굴할 여유가 조금은 있었다. ‘질병관리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내 발가락도 질병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지난겨울방학에 나는 새끼발가락을 정상적으로 셋으로 나누는 건 ‘아직은’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빨간 볼펜으로 발가락에 선을 그으며 설명했다. 발가락이 간질간질하고 기분도 나빴으나 나는 꾹 참았다. 의사가 그은 빨간 선대로 발가락을 셋으로 나눌 수만 있다면 기분 나쁜 것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선천성 발가락 합지증’은 뼈 분리 수술과 허벅지의 피부를 이식하는 수술을 함께해야 한다고, 의사는 차분하게 말했다. 피부만 붙어 있는 단순 합지증은 한 번의 수술로 가능하지만 나는 혈관, 인대, 근육, 신경 등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복합합지증이라고 했다. 수술은 2세 전후가 효과적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1.9kg으로 태어난 내가 숨을 쉬는 것만도 감사할 뿐이었다고 아빠는 말해주었다. 아기는 여러 번의 수술을 견딜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발가락을 찾으려다가 나를 송두리째 잃어버릴까 두려웠다고 했다.

  어쨌든 의사는 ‘아직은’이라고 진단했다. 그럼 ‘언제’냐고 나는 따지듯 물었다. 의사는 다시 한번 ‘아직은’이라고 말하며 ‘언제’라는 답은 하지 않은 채 내 눈길을 피했다. 내 합지증에 아무런 책임도 잘못도 없이 미안해하는 의사의 표정에서, 수술하지 않는 쪽이 현명할 것이라는 답을 읽을 수 있었다. 내 발가락을 관리해 줄 ‘질병관리부’는 어디에 있을까…….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어느새 봄볕이 내방 안쪽까지 깊숙하게 들어와 머물러 있었다. 계절의 변화가 참 신기했다. 겨울이 물러나고 봄이 오면서 햇살이 조금씩 길어지는 것이 태양의 각도 때문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른한 햇볕에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줏대 없이 이렇게 감정이 오락가락, 이랬다 저랬다 흔들리는 것도 중2병일까……. 혼자 책이나 읽는 것이 좋은 것 같다가도 친구들과 어울려 시끌벅적 놀고 싶기도 했다.

  머리를 빗으며 거울을 보니 마음에도 봄바람이 스며들었는지, 머리핀이라도 산뜻한 것으로 꽂아보고 싶었다. 나는 블랙패딩을 입고 새로 산 머리띠를 하고 앞머리를 헤어롤로 둥글게 말아 올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유리는 노란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와우, 개나리가 걸어 다니네. 배구부가 부러워.”

  우리는 팔짱을 끼고 정7각형 은색 선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걸어갔다. 학교에는 정7각형 말고도 전해 내려오는 괴담들이 많았다. 우리 학교 터가 예전에는 커다란 연못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연못에 빠져 죽은 여우가 체육대회를 하는 날마다 슬피 울어서 눈물이 비가 되어 내린다는 괴담, 전교 2등이 1등을 질투하여 옥상에서 밀어 죽였는데 이번엔 전교 3등이 2등을 밀어 죽이고 그렇게 계속 도미노처럼 밀어 죽였다는 괴담, 화장실에서 휴지가 없어 쩔쩔매는데 빨간 손이 쑥 나와서 휴지를 건네주고 그 휴지에 시험문제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는……, 등등.

  요즘 학교에는 새로운 괴담이 돌고 있었다. 해 질 녘이면 어디선가 하모니카 연주가 희미하게 들려오는데, 그 소리를 들었다는 아이들은 랩도 아니고 타령도 아닌 야릇한 리듬의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그건 노래라기보다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음산하고 기괴하게 들렸다. 따라 부르면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다는 괴담이 돌았지만 나도 종종 흥얼거리곤 했다.  

   

  나는아직도중2♬태어날때부터사춘기♬

  정7각형선을밟고♬영원히성장이멈췄지♬     


  영혼을 빼앗긴다는 노래는 따라 부르면서도 정7각형 선을 밟고 싶지 않은 건 무슨 심리일까……. 어쨌든 오늘도 보도블록의 은색 선을 밟지 않고 무사히 통과했다. 유리의 노란 운동복 탓인지 학교 가는 길이 산뜻하게 여겨졌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아직도 두꺼운 패딩을 껴입었으나 마음은 이미 봄바람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으아, 아직 춥네. 설주야, 패딩이 부럽구먼.”

  “3월까지는 패딩이 답이지.”

  “맞아, 3월 말까지는 패딩을 입는 게 정답이야. 작년 4월에는 눈이 펄펄 내렸던 거 기억나? 근데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온몸이 간질간질, 빨리 봄옷을 입고 싶엉!”



  유리와 헤어져 교실로 들어가니, 책상을 길게 연결하여 얼굴을 서로 마주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매일 생활하던 같은 교실인데도 책상 배치를 달리하니 분위기가 새로웠다. 앞에는 스크린이 설치되었고 책상마다 알파벳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뭔가 대단한 일이 펼쳐질 듯하여 나도 덩달아 기대가 되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내 성의 알파벳인 H가 붙어 있는 책상 앞에 앉았다.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선택했는지 모르겠으나 다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학급 인원과 알파벳 수가, 같은 스물여섯이었다.

  동준은 책상과 의자 사이를 넘나들며 여전히 럭비공으로 묘기를 부렸다. ‘공이 스크린이나 세워놓은 빔프로젝터에 맞으면 어쩌려고, 저러다 사고 한번 크게 치겠구먼.’ 하고 중얼거리다가 깜짝 놀랐다. 엄마가 나에게 종종 하는 잔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까불다가 사고 한번 크게 치겠구먼…….’ 평소에 그렇게 싫어하던 이런 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1학년 때 체육 선생님이 각종 구기 종목의 공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축구, 배구, 농구, 야구, 핸드볼, 골프, 탁구, 테니스, 그리고 럭비공이 있었다. 그때 본 럭비공이 참 신기했다. 다른 공들은 다 동그랬는데 럭비공만 길쭉하고 탄력도 더 좋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공이 어디로 튈지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양동준은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 여럿이서 손을 흔들며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장면이 스크린에 떴다. 어느새 선생님이 들어와 리모컨을 작동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적힌 알파벳은 모두 스물여섯 개야. 그중에 하나라도 없다면 우린 온전하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없을 거야. 우리 반 한 사람, 한 사람이 꼭 필요하고 소중하다는 의미로 붙여 보았어.”

  스크린에서 손을 흔들며 웃던 아이들이 사라지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뭉게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화면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이 너무 새파래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선생님은 손가락으로 구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구름을 연구한다면 우선 구름이란 무엇인가, 알아야 하겠지? 사랑을 연구하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알아야 연구든 뭐든 할 수 있잖아. 그 질문이 바로 모든 철학이나 인문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어.”

  ‘아, 뭐가 이렇게 어려워. 철학은 뭐고 또 사랑을 어떻게 연구한담? 중2병 연구한다면서 뭔 철학, 인문학?’

  선생님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어렵지? 그러나 이제부터 하나하나 알아가면 되는 거야. 그럼 우선 중2병이 뭔지 알아볼까.”  

   

  -중2병이란 중학교 2학년 즈음에 나타나는 병적으로 보이는 모든 현상을 일컫는다. 이런 현상은 지금까지 하지 않던 언어나 행위로 나타나는데 욕을 한다든가 허세, 자아도취, 짜증, 화 등을 다스리지 못하고 이상 행동을 보인다.                                                                                                       <지식백과>


  선생님은 스크린의 글자를 가리키며 읽어 내려갔다. 뭐든 기록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메모를 시작했다. 다꾸의 참신한 소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 제가 늘 공을 차는 행동도 중2병인가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근질근질한 것도 중2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앞으로 이런 걸 하나하나 토론하기로 하자. 이 시간에는 생각나는 모든 것을 망설이지 말고 바로바로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그럼 우선 임원을 뽑고 동아리 명칭을 정하도록 하자. 환유와 다혜는 반장·부반장이 되었으니 제외하고, 회장을 하고 싶은 사람은 손들어 봐.”

  “저요.”

  “양동준, 좋아. 또 없니? 없으면 우선 양동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회장으로서 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왜, 무엇을, 어떻게,는 모든 일의 진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방향성이거든.”


  -나는 아직 중2병 증세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럭비공을 차는 것도, 말이 많은 것도, 과자를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것도, 모두 중2병일까요? 어쨌든 내 존재 자체가 중2병인 것 같아서 회장을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임원을 한 경험이 없으니 이 기회에 열심히 해 볼게요.     


  “또 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 없으면 기록자도 한 명 정하도록 하자. 모임에서 기록자는 중요한 역할이야. 특히 우리 동아리에서는 기록이 매우 중요해. 우리가 모든 상황을 다 기억할 수 없고, 기록하지 않은 대부분의 기억은 사라져 버리지. 누가 하면 좋을까?”

  ‘기록? 기록하면 나, 한설주지. 멋진 다꾸를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아무도 나를 추천해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스로 추천하는 것이 민망하여 손을 들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럼 내가 추천할게. 한설주, 어때?”

  선생님이 나를 추천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야말로 존재감이 없고, 나도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임원을 한 적이 없었다. 순간, 임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 존재감이 없는 걸 알기에 기대하지 않았을 뿐이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동의를 구하듯 한설주를 기록자로 추천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설주의 필통을 보면 온갖 종류의 필기구들이 용도별, 색상별로 잘 정돈되어 있더라. 나도 문구류를 좋아해서 많이 가지고 있는데, 필기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꼼꼼하고 글 쓰는 걸 좋아하지. 게다가 한설주는 이미 우리 토론을 메모하고 있잖아.”

  나는 선생님이 나에 대하여 이만큼이나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선생님의 추천 덕분에 나는 얼떨결에 기록자가 되었다. 이어서 동아리 명칭을 공모했다. 평소 같았으면 말없이 조용히 앉아 있는 게 내 역할이지만, 임원이 되니 나도 뭔가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우선은 토론 내용을 간략하게 메모하고, 꾸미기는 밤에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귀와 손이 바빠졌다. 그러나 이미 글씨는 보라색, 옆에는 다양한 크기와 색깔의 별 스티커를 붙이고, 밑에는 초록 형광펜으로 풀잎을 그리려는 다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아주 편하게, 난 없다고 생각하고 너희끼리 동아리 명칭을 정하는 거야.”    

 

  -이미 너무 많이 사용하여 신선하진 않으나 ‘슬기로운 중2 생활’은 어때?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감명 깊게 봤어. 거기서 카르페디엠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피할 수 없다면 현재를 즐기라는 뜻이래. 그래서 ‘카르페디엠 중2’로 하고 싶어.     


  -우린 지금 하얀 도화지를 펴놓고 뭔가 그리려 하는데, 뭘 그릴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깨끗한 백지, 순수한 상태야. 그래서 ‘순수의 기록’이라고 지어 봤어.    

  

  -‘질병관리밴드’는 어때? 밴드는 원래 음악 하는 그룹이란 뜻이지만 모임, 연대라는 의미로도 사용하잖아.      

  투표 결과 ‘카르페디엠 중2’와 ‘질병관리밴드’가 동점으로 나왔다. 논의 끝에 두 가지 다 사용하기로 했다. 동아리 명칭은 내가 제안한 ‘질병관리밴드’, ‘카르페디엠 중2’는 슬로건으로 정했다.

  토론이 끝나고 창밖을 보니 투명하고 파란 하늘이 조금 전 스크린에서처럼 활짝 펼쳐졌다. 햇볕이 쨍쨍한 운동장에는 검은 바지에 티셔츠, 검은 모자, 검은 운동화를 신은 온통 블랙인 사람이 슬릭백 스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헛것을 봤나 싶어 다시 눈을 비비며 그 사람이 지나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2     

  피비야, 학교 앞에 정7각형 보도블록이 깔린 길이 있거든. 난 이 길을 무척 좋아해. 꿈속은 지금 한밤중이야. 나는 왼쪽 새끼발가락에 힘을 꽉 주고 은색 선을 밟지 않으려 조심하며 걷고 있어. 선을 밟으면 재수가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심조심. 시험 날 아침에 정7각형 선을 밟았다가 답안지를 한 칸씩 밀려 썼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괴담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어.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의 경쟁자는 형제나 자매라고 하는데, 경쟁자가 없는 유리와 나는 콩 반쪽도 나눠 먹는 친구야. 피비야, 어느새 나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달을 보며 유리와 속살대고 있어. 반짝이는 별도 바라보며 ‘이 별은 내 별, 저 별은 네 별.’ 하면서 사이좋게 나눠 갖는 중이야.

  그러나 내 왼쪽 발가락이 태어날 때부터 세 개뿐이라는 사실은, 아직 유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한 거야.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유리네 집과 우리 집은 구조가 똑같고, 유리와 나는 베개와 이불까지도 같아. 아쉽게도 2학년이 되면서 반은 나뉘었지만 우리는 급식실이나 매점, 또는 화장실에서라도 만나거든. 그래도 왼쪽 셋째, 넷째, 그리고 새끼발가락까지 하나로 뭉뚱그려져 붙어 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하지 못…….

  나는 몸이 자꾸 왼쪽으로 쏠리며 기우뚱해지는 것 같아. 그렇지 않다고, 네 몸매는 남산타워보다 더 반듯하고 꼿꼿하다고 엄마는 늘 말해주지만 나는 자꾸 주눅이 들어. 마음이 이미 왼쪽으로 기울어져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아, 피비야,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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