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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미 Sep 05. 2024

너도 중2병이니

  다른 날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하니 당분간 학교에 오지 못할 거라던 다혜가 유튜브로 영어 회화를 공부하고 있었다. 

  “다혜야, 어떻게 왔어?”

  “양동준이 데리러 왔어. 방과 후엔 동생도 어린이집에서 데려온다고 했어, 내일은 환유가 도와준다 하고.”

  난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공연히 심통만 부리고 원망만 한 내가 부끄러웠다.

  “이틀만 도와주면 책이나 필요한 것들을 사물함에 다 가져다 놓을 수 있을 거야. 그러면 혼자 다닐 수 있어.” 

  “다행이다. 화장실 갈 때나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콜!”

  “뭐야, 팬티까지 내려줄 기세구먼.”

  다혜가 이런 농담을 하는 것이 처음이라 신기했다. 다혜는 툭 한 마디 던지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새초롬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그때,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선생님이 들어왔다.

  “얘들아, 조용히 좀 해봐. 급하게 의논할 일이 있어. 너희 ‘다큐 어게인’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 알아?”

  네, 아니요,라는 대답이 뒤섞여서 들려왔다. 

  “그 프로그램에서 우리 동아리를 취재하고 싶다는 제안이 왔어. ‘질병관리밴드’를 그대로 프로그램 소제목으로 사용하고, 어때?”

  “와, 우리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건가요?”

  “앗싸, 드디어 방송계로 진출하는구먼.”

  동준은 프로그램의 시그널 뮤직을 흥얼거리며 좋아했다. 대체로 찬성하는 분위기였지만 다 그렇지만은 않았다. 

  “이건 얼굴이 공개되는 거니까 거의 다 찬성해야 가능해. 반대하는 사람은 촬영하지 않는다든지, 촬영 후 모자이크 처리한다든지, 방법은 있을 거야. 어쨌든 함께 의논해 보자.”

  조회 시간에 던진 선생님의 한마디로 분위기가 종일 어수선했다. 

  “난 싫어. 누군가 날 계속 관찰한다고 생각하면 불편해.”

  “이참에 머리 좀 길러볼까. 연예인들 봐, 다 머릿발이라니까.”

  “머릿발 좋아하네, 그것도 원판이 어느 정도 돼야 가능하지.”

  “패완얼,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란 말도 몰라?”

  쉬는 시간마다 모여서도 방송 얘기뿐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수업까지 이어져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 2반 왜 이래, 집중이 안 되네. 뭔 일 있냐?” 


         

  이번 주 내내 두 사람 이상만 모이면 방송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몇몇 아이들은 방송국 홈피 ‘다시 보기’에서 찾아보기도 했다.

  “그거 다 연기더라. 대본 있을 거야.”

  “아니야, 리얼 같아. 어쨌든 나를 다 드러내야 하는 적나라한 사생활 공개는 싫어.”

  “맞아, 나도 프라이버시가 있어.” 

  오늘 동아리 활동은 우리끼리 자유롭게 토론한 다음, ‘다큐 어게인’ 팀이 와서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질문도 받는다고 했다. 토론이 시작되자 나는 기록을 하느라 귀와 손이 바빠졌다. 녹음할까도 생각했으나 분량이 너무 많았다. 그걸 다시 듣는 건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간섭하지 않겠다며 여느 때처럼 지켜보기만 했다. 모든 건 자율적으로 토론하고 결정하라고 했다.   

  

  -난 촬영까지 하는 건 반대야. 우릴 관찰하겠다는 거잖아. 나는 중2가 되었다고 그리 달라진 게 없어. 예전에도 화나면 화내고, 짜증 나면 짜증 내고 그랬거든. 그런데 오히려 요즘 와서 눈치를 보게 되는 것 같아. 누가 나에게 중2병이라고 할까 봐서.     


  -어젠 엄마가 ‘학원은 안 가고 텔레비전만 보고, 너도 중2병이니?’ 하는 거야. 짜증 나서 텔레비전을 끄고 방으로 들어가려니까 누나마저 ‘쟤 중2병 맞네, 맞아, 중2병이야.’ 하는데, 그냥 확 지랄 한바탕 떨어 줬지. 난 가만있는데 주위에서 지랄을 부추긴다니까.     


  -우릴 중2병으로 몰아 심리적으로 위축시키려는 작전 아닐까. 그래, 너희 중2병이니까, 폭탄이니까, 중2가 무서워서 북쪽의 김정은도 못 쳐들어온다니까, 우리도 너희 안 건드릴게. 이런 분위기야.    

  

  -중2병에 대한 피로감에 빠진 것 같아. 버퍼링에 걸렸다고나 할까. 어쨌든 혼란스러워. 게다가 촬영까지 하는 건 절대로 반대야.  

   

  우리는 일단 ‘다큐 어게인’ 팀의 설명을 들은 다음 투표하기로 했다. 네 사람의 팀원 중 대표가 프로그램을 소개했지만 별 내용은 없었다. 우리 의견을 최대한으로 반영해 줄 테니 함께 해보자는 설득이 대부분이었다. 

  설명을 듣고 있는데 팀원 중의 한 사람, 금테 안경의 예리한 각이 햇살에 반짝였다. 갑자기 콧속이 간질간질, 재채기가 나올 듯하면서 시원하게 나오지 않아 답답했다. 금테 안경을 볼 때마다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온몸의 감각이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금테 안경을 쓴 사람이 꽤 많았다. 과학과 미술 선생님, 급식실의 조리사,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도 금테 안경을 썼다. 교장 선생님도 금테 안경이다.

  방송팀이 가고 난 후 투표가 진행되었다. 반장 선거 때보다도 분위기가 더 진지했다. 내가 지은 동아리 명칭 ‘질병관리밴드’가 프로그램 소제목이 된다니,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다. 이 기회에 나도 다꾸를 넘어 이젠 다꾸그램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꾸를 사진으로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다꾸그램, ‘다꾸러’라고 불리는 다꾸그램 마니아들이 활동하며 전시도 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투표지를 스물여섯 장 준비하여 찬성은 O, 반대는 X라고 표시하여 준비한 상자에 넣기로 했다. 회장인 양동준이 개표를 시작했다. 내가 칠판에 찬성, 반대라고 크게 쓰고 그 아래에 正으로 표시해 나갔다. 찬성, 찬성, 찬성, 몇몇이 와우, 하며 박수를 보냈다. 반대, 반대, 역시 몇몇이 좋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동준은 O 또는 X라고 적힌 종이를 한 장, 한 장, 손을 높이 들어 모두에게 보여주며 확인하게 했다. 

  찬성, 반대, 찬성, 반대가 이어지다가 13:12에서 개표가 잠시 멈췄다. 반대가 13표, 마지막 한 표의 개표만이 남았다. 두구두구두구두구……, 아이들은 책상을 마구 두드리며 긴장감을 부채질했다. 동준이 반으로 접힌 마지막 투표지를 조심스럽게 펼쳐서 보여주었다. X라고 표기된 투표지를 모두 볼 수 있도록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환영하는 박수와 동시에 비난의 야유가 터져 나왔다. 반대한 아이들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슬슬 눈치를 살폈다.    

  

  -하고 싶은 사람만 하면 안 돼?     


  -그건 아니지. 우린 한배를 타고 같은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있어.  

   

  -목적지는 같아도 다른 배를 타고 갈 수도 있잖아.   

  

  -맞아, 버스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모로 가더라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속담도 있는데. 

    

  -그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뜻인데, 그 속담이 항상 맞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커닝해도 괜찮다는 결론이잖아.  

   

  선생님은 투표 결과에 대하여 어떤 의견도 보태지 않았다. 

  “나는 ‘다큐 어게인’에 출연하는 것보다는 이런 과정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해. 우리 동아리가 무슨 대단한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그냥 있는 그대로인 너희 생각을 알고 싶어. 텔레비전에 나가는 걸 모두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구나, 그렇다면 왜 반대할까, 난 그 마음이 궁금할 뿐이야.”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질 줄 알았는데 시시하게 마무리가 되었다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몇몇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에잇, 소심하기는,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게, 짜증 나.”

  “뭐가 그렇게 어려워?”    

 

  -난 관찰당하는 것이 싫어. 촬영이 시작되면 지금까지처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을까? 벌써 머릿발 같은 이야기도 나오잖아.


  -그래, 멋진 토론을 하고 싶고, 나를 잘 포장해서 드러내고 싶을 거야. 일부러 꾸미는 건 싫어. 나는 지금 이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  

   

  토론을 마치고 간식으로 햄버거가 배달되자 교실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음식 냄새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요즈음엔 양동준이 럭비공을 차지 않으니 그나마 덜 어수선한 것 같았다. 아……, 내가 공을 교탁 밑에 숨겨둔 게 생각났다. 그날 일이 민망해서인지 동준은 공을 찾지도 않았다. 나는 시침 뚝 떼고 여전히 모른 척했다.

  동아리 모임이 끝난 후, 환유와 동준이 다혜를 서로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티격태격했다. 

  “둘 다 따라오면 죽는다.”

  한쪽 목발만 짚고 다른 쪽 목발을 휘두르면서 다혜가 말했다. 다혜는 깁스한 이후 농담도 하고 대화에도 잘 끼면서 한결 밝아졌다. 마음을 털어놓아서 그런가, 나도 털어놓으면 가벼워질 수 있을까……. 비밀 그 자체보다도 지금까지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주눅 들게 하는 것 같았다.   



            

       #6     

  피비야, 나도 털어놓으면 가벼워질 수 있을까……. 생각, 또 생각하는데 양동이가 빨리 꿈속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해. 꿈으로 들어가니 운주역에서 내린 우리는 ‘나곡동19’를 외치며 택시를 부르고 있어.

  나곡동 19번지? 몇 호, 호는 없어?

  네, 그냥 나곡동19에서 내려주시면 돼요.

  택시 기사는 우릴 힐끔거리면서 출발해. 역 주위를 벗어나자 논밭이 이어지고 있어. 큰 건물은 별로 보이지 않아. 납작 엎드린 작은 집들이 듬성듬성 보여. 개천이 나오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계곡의 폭이 점점 좁아져. 그런데 뜬금없이 커다란 호수가 나와. 산골짜기에 이렇게 큰 호수가 있네. 비현실적으로 여겨져서 으스스 으스스. 피비야, 역시 블랙은, 블랙답게 이런 음습한 곳에 숨어 있나 봐.

  택시요금 숫자가 계속 올라가고 있어. 숫자가 바뀔 때마다 우린 기사의 눈치를 살펴. 말은 못 하고 마음만 조마조마. 갑자기 포장도로가 뚝 끊기고 흙길이 나와. 다 왔다고 내리라는 기사의 말에 우리는 밀려나듯 내려. 그리고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는 중이야. 

  여기가 나곡동19야?

  집이 한 채도 없잖아. 사람도 없고.

  양동이가 폰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설주야, 나곡동19번지 맞아?

  응, 분명히 봤어.

  산속이잖아. 사람이라도 있어야 물어보든지 할 텐데.

  저쪽으로 좀 걸어가 보자.

  우리는 걸어가며 누군가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지만, 아무도 없어.

  주소를 잘못 본 거 아니야?

  확실하다니까, 나곡동19.

  기사도 몇 호냐고 물었잖아. 그 뒤가 중요한데.

  그 뒤가 중요하다고 양동이가 말하니 환유가 문득 멈춰 서서 바라봐.

  그 뒤? 방금 뒤라고 했어? 설주야, 넌 19까지만 본 거잖아. 그렇담 19가 아니라 백구십몇 번지일 수도 있다는 거잖아. 경우의 수를 계산해 보면…….

  경우의 수, 그게 뭐야?

  양동이가 경우의 수가 뭐냐고 묻자 다혜가 대답해.

  2학기 되면 배우는데 이게 190번지에서 199번지일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넌 벌써 그런 걸 알아? 선행 학습했구먼. 동생 돌보느라 학원도 안 다닌다면서.

  동준아,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EBS는 내 친구라고.

  서울대학교에 수석 합격한 사람들이 교과서만 열심히 봤어요,라는 말과 똑같구나. 에잇, 재수 없으려고 하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다혜 의견이 맞아. 설주는 190에서 199를 19까지만 봤을 수도 있어. 설주야, 19 뒤에 ‘번지’라는 글자도 분명히 봤어?

  피비야, 곰곰 생각해 보니 ‘번지’를 본 적은 없는 것 같아. 나는 민망하여 기어드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해.

  번지는 못 본……것 같……. 

  그렇담 단위가 백이 아니라 천일 수도 있는 거잖아. 1900번지부터 1999번지까지.

  ……. 

  경우의 수가 어쨌다고? 난 아직 그런 거 몰라. 그렇담 블랙을 만날 경우의 수는 제로인 거야? 안 그래도 민망해 죽을 지경인데, 이럴 땐 빨리 꿈에서 깨어나는 게 해결책이지? 그런데 얼핏 떠오르는 생각, 혹시, 혹시, 혹시 말이야. 조금 전 택시 기사가 블랙 아닐까? 우릴 이런 데 버리고 간 걸 보면 블랙이 틀림없어. 그는 곧 일당들을 몰고 들이닥칠 거야. 피비야, 나를 꿈에서 구해 줘, 어서 나의 파수꾼이 되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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