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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미 Sep 06. 2024

내면아이

  나는 우리 선생님도 중2병 증상이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중2병이 전염병이라면 그럴 가능성은 매우 크다. 주위가 온통 중2 바이러스로 득시글득시글하니까 선생님이 감염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선생님은 ‘조’와 ‘울’의 리듬이 주기적으로 변화를 보인다. 대부분 주초에 ‘울’의 감정이 나타난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해서 그걸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저 말이 없고 잘 웃지 않을 뿐이다. 주초에 선생님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응, 그래, 알았어, 하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오늘 동아리 활동에서는 열정의 포텐이 한꺼번에 터졌다. 

  “오늘은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쳐서 중2병에 대하여 아무 이야기나 막 던져보는 거야. 현실적이어도 좋고 판타지도 대환영이야. 누군가 이야기를 꺼내면 거기에 마구 덧붙이기를 해도 좋아. 자, 시작해 볼까. 어차피 정답은 없는 거니까 그냥 막 질러 보자.”    

 

  -팬데믹 시대에 어른들은 거의 다 백신을 접종했잖아. 처음엔 한 번만 맞으면 될 줄 알았는데 2차, 3차로 이어져서 QR로 증명해야 어디든 갈 수 있었어. 그렇다면 중2병도 코로나19처럼 백신을 개발할 수 있을까. 

    

  -중2병이 질병이라면 무슨 과에서 진료할까. 내과나 외과는 아닐 테고, 소아청소년과일까.    

 

  -신경과 아닌가. 중2병은 자아의 혼란에서 온다고 하던데 그게 뇌의 영향이라고 들었어. 그러니까 신경과가 맞을 거야.  

   

  -중2병은 마음의 영역이지. 마음을 치료하는 건 정신건강의학과잖아.    

 

  -그만 좀 놀아라, 콜라 먹지 마라, 폰 그만해라, 텔레비전 그만 봐라, 하지 말라는 것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이러다간 숨 쉬는 것과 공부 빼고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할 것 같아.     

 

  -어른들은 기다릴 줄을 몰라. 뭐가 그렇게 바쁜지 빨리빨리, 어른들은 모두 빨리병에 걸렸어. 빨리병도 질병일까. 빨리병은 무슨 과로 가야 할까. 중2병 백신보다 빨리병 백신부터 개발했으면 좋겠어.     


  -코로나19는 바로 백신을 만들었잖아. 홍역, 콜레라, 독감 등 다 백신이 있는데, 중2병 백신은 왜 없을까.      

  -질병관리청에 의견을 모아서 보내볼까. 중2병 백신을 만들어달라고 하자.     

 

  우리는 당장이라도 질병관리청으로 몰려갈 기세였다. 나는 메모하며 머릿속으로는 다꾸를 하느라 몹시 분주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내가 다꾸한 것을 보고 기록을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나는 다양한 펜과 스티커와 꽃잎, 나뭇잎, 사진, 어설프지만 그림까지 그려가며 다꾸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아이들도 어쩜 이렇게 기록을 잘하냐고 추켜세우며 비결을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토론을 들으며 명사와 동사 위주로 메모했다가 나중에 문장으로 완성하여 기록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날의 토론은 바로 그날 기록하는 것이다. 기록하지 않은 대부분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리니까.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잘하는 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으쓱했다. 동아리 활동을 통하여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건 선생님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토론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내가 더 많은 걸 배운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동아리는 무슨 대단한 활동을 한다기보다는 토론하면서, 더 나아가서는 각자의 시간을 기록하면서 스스로 치유하고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나는 ‘청소년의 일기 쓰기가 내적 성장에 미치는 영향’도 논문으로 쓸 계획이야…….”    


      

  시간이 어느덧 여름 한복판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5교시엔 매미가 더 극성맞게 울어댔다. 사실은 우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아무리 요란하게 떠들어대도 내 꿀잠까지 방해하진 못했다. 오히려 자장가처럼 달콤하게 들리곤 했다. 밀려드는 졸음과 싸우느라 이를 악물며 하품을 참고, 온몸이 꽈배기처럼 꼬이는 걸 반대편으로 틀어가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터키행진곡이 나를 구원해 주었다. 이런 나를 보고 동준이 말했다.

  “설주야, 꾸벅꾸벅 졸지 말고 쉬는 시간에 좀 자라.”

  “흥칫뿡이다, 이 소중한 쉬는 시간에 아깝게 왜 자냐?”

  유리와 함께 매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터키행진곡을 들으며 다시 교실로 돌아오니 6교시 수업은 국어였다. 선생님은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싱글벙글, 얼굴에 미소가 가득 번지는 걸 숨기지 못했다.

  “우리 동아리의 첫 체험활동인 방송은 다수결에 의하여 이뤄지지 못했잖아. 이번엔 두 번째 체험활동을 제안할게. 중2병 백신 개발에 관한 한설주의 기록을 내가 지도교수님에게 메일로 보냈거든. 그랬더니 방금 답장이 왔어. 읽어 줄게 들어 봐.”  

  

  -‘질병관리밴드’ 학생들에게

  ‘청소년 마음연구소’가 지원하는 ‘질병관리밴드’가 모범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은 잘 듣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중2병 백신에 관한 기록을 보니 매우 기발한 발상이라 놀랍고 흥미롭습니다. 이 토론 내용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께 보여드리니 동아리 전원을 국립운주병원에서 초대하겠다고 합니다. 이 병원은 정신건강 전문병원이며 부속으로 ‘청소년 정신건강센터’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동아리 활동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방문 날짜를 의논하여 알려주세요.    

  

  -이러다가 정말 백신이 개발되는 거 아니야? 백신이 개발되면 뭐가 좋을까?   

   

  -백신이 개발되면 우린 공부만 하는 로봇이 되고 말 거야. 바른 생각만 하고, 바른생활만 하는 중2 로봇들.      

  -선생님과 부모들이나 좋겠지, 골치 아픈 학생들이 없을 테니까. 백신을 1차 2차 3차 끝없이 접종하고, 잘 훈련된 개처럼 말 잘 듣는 청소년들. 어른들을 위하여 우리가 백신을 꼭 맞아야 해? 난 접종 거부할 거야.  

   

  -백신 접종 안 하면 학교도 못 오게 하고,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당장이라도 백신이 개발될 것처럼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기말고사가 끝나는 토요일에 방문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울게. 교장 선생님께 보고하고 허락도 받아야 하니까. 이젠 분위기 좀 가라앉히고 기말고사에 파이팅! 하자.”

  아, 기말고사라는 장애물이 있었구나, 들떴던 교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때 환유가 일어나서 질문을 했다.   

  

  -선생님, 우린 계속 마음을 털어놓고 문제점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에 대한 답은 누가, 언제 해주나요?    

 

  순간, 나에게 ‘아직은’이라던 의사가 떠올랐다. 의사는 ‘아직은’이라고 말했을 뿐 ‘언제’라고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언제’는 언제일까……. 

  “그래, ‘우린 지금 이런 상황인데, 그래서 뭘 어쩌라고? 해결책이 뭔데?’라고 묻고 싶을 거야. 이건 수학처럼 똑 떨어지는 정답을 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건, 모두 잘 알고 있지? 그래서 바로 지금, 우리가 함께 그 정답 없는 해답을 찾아가는 중이잖아.”

  선생님의 열정 그래프가 최고점을 향하여 달려가고, 덕분에 우리는 곧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국립운주병원으로 가는 길엔 보슬비가 내렸다. 햇살이 너무 쨍쨍한 것보다 적당하게 촉촉한 것이 더 좋았다. 마음에도 습도가 있는 것 같았다. 바싹 말랐던 마음이 스펀지처럼 빗줄기를 쫙쫙 빨아들였다. 길가의 나무들은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 더욱 선명해졌고 버스 유리창에는 방울방울 빗방울이 맺혔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혀 또르르 굴러 떨어지고, 그 자리를 다른 빗방울이 재빠르게 메꾸는 걸 한참 바라보았다.

  내가 중2라는 현실과 지금 체험 활동하러 가는 길이 새삼 뿌듯하게 여겨졌다. 내 생각을 쓰고 동아리의 활동을 기록하는 것이 존재감 없던 나에게 의미를 더해주었다. 빗방울을 하나, 둘, 헤아리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가 안전벨트를 푸느라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하지만 버스는 아직도 달리고 있었다.

  “아직 5분쯤 더 가야 하니까 앉아서 기다려.” 

  기다려……, 기다리라는 말이 마음에 콕 들어와 박혔다. 우리에겐 기다리라면서 어른들은 왜 우리를 기다려주고 지켜주지 못하는 걸까. 언젠가부터 기다리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달리다 보니 땅은 보송보송했고 화창한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고 있었다. 이 지역은 비가 내린 흔적이 아예 없었다. 아직 여름이 한창인데 성급하게 얼굴을 내민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며 고개를 저었다. 버스는 들판을 달리다가 ‘<질병관리밴드> 학생들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린 병원 정문을 지나서 멈춰 섰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강당으로 가서 원장님의 말씀을 들었다. 


  -여러분을 초대하게 된 동기는 여러분이 중2병 백신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발한 발상을 하게 됐죠? 그런데 중2병은 예방 접종을 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에요. 그 과정을 겪으면서 항체와 면역력이 생겨야 해요. 마음에도 근육이 있어요. 근육이 알차고 단단하게 여물도록 단련해야 합니다. 중2는 앞으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이에요. 어른들은 그걸 바라보고 기다려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기가 참 쉽지 않아요. 부모님이나 선생님, 그리고 여기 있는 나조차도 완벽하게 성숙한 인간이 아니에요. 우리는 영원히 성장 중인 사람들입니다.   

   

  나는 원장님의 인사말을 부지런히 받아 적었다. 원장님의 말씀은 이해될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백신이 최선은 아니라는 말에 아쉽기도 했다. 더구나 어른들마저 아직도 성장 중이라니, 그렇담 얼마나 더 성장해야 진짜 어른이 되는 걸까……. 

  다음엔 트라우마와 ‘내면아이’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강사인 의사 선생님은, 누구나 마음속에 어린 시절의 상처와 결핍을 지니고 있는데 그걸 ‘내면아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내면아이’라는 말에 왼쪽 새끼발가락이 ‘나 여기 있어요.’ 하듯 자꾸 꼼지락거렸다. 마음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항상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같았다. 트라우마라는 말에는 바로 블랙의 금테 안경이 떠올랐다.

  이어서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상담실로 들어갔다. 나는 환유와 짝이 되었다. 상담사는 환유에게, 가장 마음을 열고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환유는 아빠라고 했다. 환유는 아빠가 되고 상담사는 환유가 되어 즉흥 역할극을 했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기록했다.     


  아빠 역할(환유) : 넌 매일 고양이 동영상만 보고, 공부는 언제 할 거니? 

  환유 역할(상담사) : 지금 막 공부하려고 했어요. 이것만 보고요.

  아빠 역할(환유) : 공부하려면 또 어지럽다고 할 거지? 

  환유 역할(상담사) : 정말 어지러워요.

   (아빠 역할이 환유 역할을 억지로 끌고 가서 창밖을 보게 한다.)

  아빠 역할(환유) : 정신력이 약해서 그런 거야. 여기 좀 봐, 33층 뷰가 얼마나 멋지냐. 

  환유 역할(상담사) : 어지러워서 못 보겠어요. 

  아빠 역할(환유) : 어지러워? 너도 중2병이냐?

  환유 역할(상담사) : 중2병은 병이 아니에요. 병 말고, 뭔가 다른 표현 없어요?

  아빠 역할(환유) :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지. 나는 가난 때문에 얼마나 힘들게 공부했는지 알아? 너무 힘들어서 중2병에 걸릴 틈도 없었어, 중2병이 뭔지도 몰랐어. 학교에서 주는 급식 우유는 동생 갖다주려고 먹고 싶은 걸 꾹꾹 참으며…….     


  환유는 정말 아빠가 되기라도 한 듯, 숨 쉴 틈도 없이 많은 말을 쏟아냈다. 갑자기 환유가 상담사를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상담사는 환유에게 마음을 포옹해 주기 위하여 항상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고 치료를 받는 것처럼, 마음이 아플 때는 언제든 찾아오라며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나도 눈물을 참으려고 눈을 크게 부릅뜨며 꾹꾹 참았다.

  옆 상담실에서 나오는 아이들도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슬쩍 바라본 양동준의 눈가가 유난히 발그레했다. 아마도, 어쩌면, 다들 마음에 새끼발가락 같은 ‘내면아이’ 하나씩은 품고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과일과 아이스크림 등을 먹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흰색 가운을 입은 남자가, 환자복을 입은 중학생인 듯한 남자아이와 산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커다란 타원형의 운동장을 거닐며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운동장 주위로 소나무가 빽빽했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외모와 상관없이 사람이 아름답다고 생각된 건 처음이었다.

  문득 아이가 멈춰 섰다. 흰색 가운을 입은 남자가 다가가 아이의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마치 내 새끼발가락을 어루만져주는 듯한 착각이 들어 발가락이 간질간질했다. 두 사람은 운동장과 내가 있는 곳 사이의 텃밭으로 걸어와서 쪼그려 앉았다. ‘힐링 텃밭’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식당이 1층이라 훤히 내다보였다. 남자아이는 내 또래로 보였는데 너무 말라서 환자복이 헐렁헐렁했다. 저 아이는 어떤 ‘내면아이’를 품고 있어서 여기 입원했을까. 

  두 사람의 행동으로 짐작해 보니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유리창인 것 같았다. 아이가 토마토를 가리키자 남자가 꼭지를 땄다. 아이가 입을 크게 벌려 토마토를 와삭 깨물었다. 순간 내 입안으로 침이 가득 고여 나도 모르게 꿀꺽 삼켰다. 토마토가 떫은지 아이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남자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시간이 멈춰 선 듯, 내가 낯선 우주에 와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발가락이 신발 속에서 자꾸 꼼지락거렸다. 나도 맨발로 바닷가를 걷고 싶고 수영장에도 가고 싶다, 맨발로 슬리퍼도 신고 싶다, 발가락을 햇볕에 보송보송하게 말리고 바람도 쐬어주고 싶다…….

  “야, 문설주, 다들 강당으로 갔는데, 얼마나 여러 번 불렀는데, 안 들리냐?”

  “…….”

  “헐, 정말로 문설주라고 해야 들리나 보네. 한설주라고 아무리 크게 불러도 못 듣더니.”

  강당에선 병원 직원과 환자들로 구성된 합창과 오카리나 공연이 펼쳐졌다. 오카리나 연주는 마치 새가 노래하는 것 같았는데, 실제로 숲에서 오카리나를 연주하면 새들이 화답한다고 했다. 특히 우리 학교의 벨 소리인 터키행진곡을 연주할 때는 모두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우리를 위한 세심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고 소중하게 대접해 주려는 정성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강당에서 전시실로 자리를 옮겼다. 디카시와 그림과 인형, 캘리그래피 등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입원 환자들이 손수 만들었다고 했다.

  “자연이나 사물들이 나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올 때가 있잖아요. 그 풍경을 사진으로 찍고 걸어온 말을 짧은 시로 표현하는 것이 디카시예요.”

  설명을 들으며 나도 디카시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도 부르고, 오카리나 연주도 하고, 그림도, 인형 만들기도 다 따라 하고 싶었다. 전시된 인형 중에는 펭귄도 있었다. 나는 펭귄 발가락을 어루만지고 상담사가 환유에게 했던 것처럼 토닥토닥 다독여주었다.

  ‘괜찮아, 발가락이 세 개뿐이지만 이 세상 어디라도 못 갈 곳은 없어. 오히려 미끄러운 얼음 위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잘 걸어 다니잖아, 조금 뒤뚱 일 뿐이지…….’        


  

  돌아오는 버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파랗던 하늘이 보라색인지 주황색인지, 온갖 색이 섞인 오묘한 빛깔로 물들어갔다. 이 세상 모든 색이 하늘로 올라가 물결이 되어 출렁이는 것 같았다. 색깔은 흘러가는 구름에도 스며들어 아스라한 수채화를 그려냈다. 둥근 태양이 산 뒤쪽으로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태양이 있던 자리엔 발그스름한 흔적만이 남았다.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발가락, 그까짓 게 뭔데?’

  “잠꼬대하냐, 발가락이 뭐 어쨌다고?”

  옆에 앉은 다혜가 물어도 나는 정말 잠꼬대인 척하며 창밖만 내다보다가 정말 잠이 들고 말았다.      

    



       #7     

  잠든 척하다가 정말 잠이 들어버리는, 피비야, 놀랍지? 게다가 버스에서도 꿈을 꾸는 이 능력, 어떻게 생각해? 꿈에서도 나는 펭귄 발가락을 꼭 쥐고 연속드라마처럼 연이어서 또 꿈을 꾸는 중이야. 그런데 피비야, 국립운주병원과 운주역……, 이렇게 꿈과 현실이 연결되는 걸 보니 블랙이 이 근처 어딘가에 있는 게 확실해. 역시 내 식스센스는 대단! 그나저나 다리도 아프고 본격적으로 배가 고프고 목도 말라. 도대체 어디 가서 블랙을 찾는단 말이냐!

  계곡의 폭이 조금씩 넓어져. 양동이가 계곡으로 다가가 세수하고 있어. 손바닥을 오므려 물도 떠 마셔. 

  캬, 시원하다. 너희도 마셔.

  에잇, 더러워.

  목이 덜 말랐군. 엄청 맑아.

  양동이가 샌들을 벗고 계곡으로 들어가. 그리고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마구 뿌려대. 헉, 그런데 양동이 왼쪽 발가락이 세 개뿐이야! 환유도 샌들을 벗고 계곡으로 들어가. 피비야, 이럴 수가, 환유 왼쪽 발가락도 세 개야! 환유도 양동이에게 물을 마구마구 뿌리고 있어. 다혜까지 계곡에 발을 담그네. 허걱, 피비야, 다혜는 오른쪽 발가락이 세 개뿐이야!

  설주야, 들어와. 정말 시원해.

  그래, 우리 맨발로 인증 사진 남기자. 프사에 올려야지. ‘나곡동 19번지를 찾아서’라고 상태 메시지도 쓰고.

  나도 운동활 벗어던지고 뛰어 들어가. 우린 발을 물속에 나란히 넣고 사진을 찍어. 우리 네 사람의 발가락은 모두 합해서 서른두 개야. 사×팔은 삼십이, 맞지? 나는 자꾸 발가락을 헤아려 봐. 그리고 텀벙텀벙 계곡을 뛰어다니고 있어. 물방울이 마구 마구마구 튀어 올라. 물방울에 여름 햇살이 동그랗게 내려앉네. 동그란 무지개가 사방으로 날아다녀. 서른두 개의 발가락도 함께 날아다녀. 피비야, 너도 발가락이 몇 개인지 세어 볼래? 혹시, 피비야,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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