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늦은 오후에 유리와 함께 산 쪽으로 올라가는 길을 산책했다. 아파트 담벼락에는 코스모스가 색색의 얼굴을 자랑하며 가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다혜네 아파트 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다훈을 만났다. 엄마인 듯한 여자와 함께 있었다. 여자는 동네에서 늘 보던 엄마들과는 달리 옷차림이 화려했다. 9월에 입기엔 좀 추워 보이는 민소매 꽃무늬 원피스에 반짝이 구슬이 달린 샌들을 신고 있었다. 귤색으로 페디큐어를 한 발가락이 하얗고 예뻤다.
“누나, 우리 엄마 이쁘지?”
멀리서 다훈이 먼저 알아보고 달려와 뽐내듯 말했다.
“그래, 무지무지 이쁘다. 누난 함께 안 왔어?”
“누나는 싫대. 우리 누난 까칠해. 까칠이 누나야.”
어린아이가 까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몹시 귀여웠다. 다혜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 같아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다혜 엄마가 다가와 다훈의 손을 잡았다.
“난 엄마랑 짜장면 먹으러 간다.”
다훈은 엄마 손을 잡고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어갔다.
“다혜랑 떡볶이 먹으러 갈까?”
다혜를 만날 계획은 없었으나 유리가 다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워터파크를 다녀온 이후로 나만의 기분 탓일까, 톡을 하면서도 자꾸 다혜의 눈치를 보고 주눅이 들었다. 이 기회에 유리와 함께 만나면 좋을 듯싶어서 나는 얼른 다혜에게 톡을 보냈다.
-너희 집 근천데 떡볶이, 콜? ㅋㅋ
다혜는 전과는 달리 목둘레가 축 늘어진 티셔츠를 입은 채로 나왔다. 조금 전 만난 다혜 엄마의 옷차림과 비교가 되었다.
“막 뛰어왔어.”
“이젠 완전하게 다 나은 거야?”
다혜는 제자리에서 발을 탁탁 구르다가 뛰어 보이기까지 했다.
“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엄청 털털하다. 원래 그랬어?”
“유리야, 내가 어땠는데?”
“털털은 아니지.”
“나 원래 자유롭고 쉬운 여자야.”
“무슨 뜻이야?”
“털털이 영어로 프리 앤 이지래.”
“오, 그런 영어는 어디서 배워? 넌 학원도 안 다니잖아.”
“유튜브. 요즘은 미국 드라마 보는 재미에 푹 빠졌어.”
“다 알아들어?”
“그냥 짐작으로 들어.”
유리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가장 부럽다며, 그리고 다혜 너는 재수 없을락 말락 하면서도 친해지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유리는 정말 비틀리고 꼬인 구석 하나도 없이 항상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했다.
우리는 조금 걷다가 산어귀의 공원 벤치에 앉았다. 공원 여기저기에도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있었다. 같은 듯하면서도 색깔이나 생김새가 조금씩 다 달랐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다가 초가을의 바람마저 상쾌했다.
“난 엄마와 안 친해. 말도 잘 안 해.”
묻지도 않았는데 다혜가 불쑥 엄마 이야기를 꺼냈다.
“좋겠네.”
“뭐가?”
“엄마랑 말 안 할 수 있어서 좋겠다고.”
“유리야, 진심이야?”
“가끔은……, 우리 엄만 말을 안 할 수 있게 날 내버려 두질 않아.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을 때도 있잖아. 엄마는 잔소리를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아. 그런데 넌 심각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하는 묘한 재주가 있다.”
유리야말로 다혜의 심각한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주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전혀 다른 스타일의 두 사람은 성의 없이 툭툭 말을 주고받는 것 같으면서도 잘 어우러졌다. 오히려 내가 머쓱할 정도로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이 없었다.
“우리 엄마는 가수가 꿈이란다.”
“가수?”
“응, 싱어.”
“와우, 다혜 엄마 멋있는데!”
“뭐가 멋있냐, 마흔도 넘어서 꿈 타령이나 하는 게 멋있니?”
“꿈에 나이가 어딨어?”
다혜는 유리를 뚫어질 듯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사 다니랴, 살림하랴 피곤하다면서도 밤에는 노래 연습하러 다니는데, 정말 멋있냐?”
우리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발을 흔들며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코스모스도 보다가,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유리가 갑자기 생각난 듯 툭 한 마디 던졌다.
“나, 블랙 봤다.”
“어디서? 언제?”
“지난 금요일에 청소하고 혼자 내려오는데 미술실에서 툭 튀어나오더라고. 날 보자 순식간에 사라졌어. 네 말대로 검은색 옷에 모자와 마스크, 온통 블랙인 데다가 금테 안경도 썼더라.”
“많이 놀랐겠다.”
“놀라긴 했는데 무섭진 않았어. 날 보고 도망간다기보다는 그냥 자기 갈 길 간다는 듯 당당함? 그러다가 갑자기 슬릭백으로 복도 끝까지 걸어가는 거야. 스타일이 늘씬하고 눈초리만 봐도 잘 생겼을 거 같은 분위기, 뭔지 모르게 매력 있었어, 아우라!”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블랙의 흔적을 정리하려 나는 머리를 서너 번 저어 보았다. 그러나 머릿속은 오히려 더 뒤엉키는 것 같았다.
“유리 너, 또, 또, 잘생긴 거 무지 밝히는구나. 그러다가 블랙에게 영혼을 털리고 말걸?”
“그려, 나 금사빠다, 눈길만 스쳐도 금방 사랑에 빠지는 여자야. 아아, 나도 누군가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싶다.”
“나는 이미 보라색 하늘에 마음을 빼앗긴 것 같아.”
다혜는 숨까지 킁킁, 들이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하늘은 차츰 옅은 보라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파란 하늘에 붉은 물감이 한 방울 똑 떨어져 서서히 번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셋이 앉아 있는 게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론 외로운 느낌도 들었다. 파랑에 붉은 물감이 번지듯 쓸쓸함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이건 뭐지, 드디어 블랙에게 영혼을 털린 건가, 외로운 이유가 뭔지도 모르겠고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떡볶이 먹자며, 분위기 왜 이래?”
“그래, 가자, 가자, 고고.”
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호들갑을 떨며 일어섰다. 다혜가 다가와 슬며시 내 팔짱을 끼었다. 나는 갑자기 눈두덩이 뜨끈해졌다.
떡볶이를 먹고 다혜를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다시 산책하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유리와 둘이 그네에 앉았다. 나는 그네를 타는 것보다 그냥 그네에 앉아 흔들흔들하는 걸 더 좋아했다.
“설주야, 나 다혜 엄마 누군지 알아.”
“누군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봤어. 확실해.”
유리는 유튜브를 찾아 보여주었다. 까만 시스루 블라우스에 보라색 통바지를 입은 여자가 긴 머리카락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런 음악을 록이라고 하지?”
“응, 맞네, 멋있다.”
그때, 유리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은 유리는 입을 삐쭉거리며 투덜거렸다.
“빨리빨리, 뭐든 빨리빨리, 우리 엄만 빨리병에 걸린 것 같아. 빨리병도 질병이지? 빨리 학교 가라, 빨리 공부해라, 빨리 일어나라, 빨리 밥 먹어라, 빨리 들어와라, 빨리빨리, 빨리…….”
유리는 노래를 부르듯 빨리빨리,라고 중얼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혼자 그네에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썹처럼 보이는 초승달이 까만 하늘 위에 드러누워 조각배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나는 달을 바라보면서 조그맣게 흥얼거렸다.
나는아직도중2♬태어날때부터사춘기♬
정7각형선을밟고♬영원히성장이멈췄지♬
“얘, 너 아까 만난 다혜 친구 맞지?”
돌아보니 다혜 엄마가 유리가 앉았던 그네에 앉아 있었다.
“다훈이 데려다주고 산책하러 나왔어. 넌 이름이 뭐야?”
“설주예요, 한설주.”
“이름 예쁘다.”
“예쁘긴요, 문설주라고 놀림 많이 받아요.”
“흥, 그런다고 한설주가 문설주 되냐?”
옷차림이나 태도, 말투까지도 여느 엄마들과는 달랐다. 매력적이라는 느낌과 함께 다혜가 엄마 닮아서 예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가을의 바람에서는 나무와 꽃과 풀잎이 어우러진 달착지근한 향기가 났다. 지금 이 장면을 꿈속에서 본 것 같았다.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얀 울타리를 타고 핀 코스모스의 빨강과 노랑과 보라, 느티나무의 초록, 들꽃, 그리고 흐린 하늘에 희미하게 걸린 달……. 아니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헷갈렸다.
“넌 뭘 잘하니, 좋아하는 거 있어?”
“……잘 모르겠는데, 요즘엔 뭘 쓰는 게 좋아요. 쓸 게 떠오르지 않으면 책에서 마음에 드는 글을 베껴 쓰며 다꾸해요.”
“다꾸? 그게 뭐야?”
“다이어리 꾸미기라고 일기 비슷한 거예요. 그냥 아무거나 떠오르는 생각을 끄적여요. 글을 다양한 필체와 색깔로 기록하고, 그림도 그리고, 스티커도 붙이며 장식하는 거예요. 이걸 사진으로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다꾸그램도 있어요. 다꾸 전시회도 하고요. 지금 개인적인 다꾸와 동아리 활동 다꾸를 따로 하고 있는데요, 곧 다꾸그램도 할 거예요.”
나는 신이 나서 다꾸의 세계와 ‘질병관리밴드’에 대하여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너랑 얘기하다 보니까 내가 모르는 세상이 참 많구나.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다양해져서 따라잡기가 쉽지 않아.”
지금까지 엄마와 아빠는 물론 어른과 이런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미열이 올라오는 듯 오슬오슬했다. 그 외에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깔깔거리며 웃다가 문득 심각해지기도 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내 새끼발가락을 다혜 엄마에게 털어놓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로 나는 블랙에게 영혼을 빼앗긴 것만 같았다.
“넌 기자나 작가가 되면 좋겠다.”
“작가는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어요?”
“글쎄, 우선 책을 많이 읽고, 지금 넌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꿈을 일찍 발견하고 그 꿈에 빨리 다가갈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지.”
“나에게 정말 글 쓰는 재능이 있을까요?”
“재능? 이 꼬마 아가씨야, 좋아하는 게 곧 재능이야. 난 너만 할 때부터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거든. 그런데 그땐 그게 재능이란 걸 몰랐지. 애고, 난 그걸 몰라서 지금에서야 이러고 있잖니.”
좋아하는 게 곧 재능이라니……, 나는 당장 작가가 되기라도 할 것처럼 설레었다. 그리고 다혜 엄마 같은 멘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비밀을 털어놓으면 다혜 엄마는 ‘흥, 손가락도 아니고 발가락이 그래서 살아가는데 뭔 지장 있냐?’, 그럴 것 같았다. 다혜 엄마는 거침없이 말하고 별일 아닌 것에도 소리 내어 웃었다. 깔깔 웃던 다혜 엄마가 갑자기 정색하고 물었다.
“넌 엄마에게 원하는 게 뭐니? 보통 어떤 요구를 해?”
“음, 너무 많아서……,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다고 엄마가 나보고 진상이래요.”
“그렇지? 너희 나이 때는 부모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원하는 게 정상이지. 원래 엄마와 딸은 호구와 진상의 관계여야 하는데, 다혜는 왜 그런지 모르겠어……. 세상에서 젤 어려운 게 엄마 역할이야. 오히려 지가 엄마 노릇을 하려고 한다니까.”
다혜 엄마의 눈가에 그늘이 살짝 드리워졌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드디어, 내가 발가락과 함께 블랙에 관한 괴담을 막 털어놓으려고 하는데…….
“민소매 입었더니 춥다. 일교차가 많이 나네.”
다혜 엄마가 팔뚝을 문지르며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나도 다리가 서늘하고 팔에도 오스스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바닥에 뒹굴던 나뭇잎이 높이 날아올랐다. 다혜 엄마는 펄럭이는 치마를 두 손으로 잡으며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가 오려나 보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빗방울 하나가 내 이마 위로 똑 떨어져 내렸다.
“어머, 어떻게 비가 올 줄 알았어요?”
“오래 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게 있어. 그만큼 모르는 것도 점점 더 많아지고.”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눈만 껌벅거렸다. 저절로 알게 되는 것, 그만큼 점점 더 많아지는 모르는 것들…….
“우리 오늘 만난 거 다혜에겐 비밀이다. 자기 친구랑 쓸데없는 얘기 했다고 지랄할걸?”
지랄이라는 말에 우린 친구처럼 마주 보고 또 킥킥 웃었다. 다혜 엄마는 빨리 들어가라고 손짓하면서 뒷걸음으로 놀이터를 빠져나갔다. 그런 모습은 우리 엄마와 다를 게 없어 보이기도 했다. 툭툭 내뱉는 듯한 말투가 시원시원하면서도 따뜻함이 느껴지고, 특히 눈가에 묘한 매력이 서려 있었다. 유리가 아우라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도 다혜 엄마처럼 매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도 집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별마저 없는 하늘은 그냥 새카맸다. 가로등 불빛에 빗줄기가 그으니 하늘이 눈물을 흘리는 듯 보였다. 모든 길고양이를 별이라고 부른다는 환유가 생각나서 혹시 땅 위에라도 별이 있나,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그러나 땅 위의 별마저 비를 피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잠자리에 누워서 나는 정말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 머릿속에는 온갖 괴담과 악마의 속삭임과 블랙의 금테 안경 등이 환상으로 버무려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조금씩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9
피비야, 나는 내가 글 쓰는 재능이 있다는 걸 오늘에야 알게 된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좋아하는 게 재능이래. 꼭 잘해야만 재능이 아니라 좋아하면 자꾸 하고 싶고, 그러다 보면 잘할 수도 있으니까. 최유리도 배구를 많이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점점 잘하더라. 유리는 이미 배구 선수나 다름없어.
나도 매일 일기를 쓰다 보면 작가가 될지도 몰라. 그런데 작가가 되려면 마법의 주문이 필요해. 마법을 걸어서 흐르는 시간을 묶어서 꽁꽁 가둬놔야 해. 그래야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미래로 훨훨 날아다닐 수 있지. 시간을 가두지 않으면 기억이 몽땅 새어나가거든. 내가 작가가 되면 저장한 이 꿈을 글로 쓸 거야. 그러려면 너의 도움이 필요해. 피비야, 나에게 블랙을 찾아줘!
우리의 꿈속 자발적 체험활동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나 봐. 슈퍼맨은 지구를 거꾸로 회전시키고 시간을 뒤로 돌려서라도 레인을 구하잖아. 그러나 피비야, 이 모든 건 꿈인 걸 어떡해. 지금 이 생각도 꿈인 걸……. 현실이었다면 우린 블랙을 찾았을 거야. 아무렴, 꼭 그랬을 거야. 어쨌든 다음 꿈에서는 꼭 블랙을 만나길 바라. 피비야, 내 꿈을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