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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미 Sep 07. 2024

8. 그래도 하하하

  “우리 워터파크 갈까?”

  여름방학을 앞두고 유리가 먼저 제안했다. 점심을 먹고 다혜와 셋이 댄스 동영상을 보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동준도 거들었다.

  “좋다, 좋아, 고고!”

  “넌 왜 끼냐, 왜 엿듣고 그래?”

  “유리야, 그냥 들리는 걸 어쩌라고?”

  “싸우지들 마, 난 어차피 못가.”

  “다혜야, 왜, 왜, 왜 못가?”

  “4시에 동생 데리러 가야 해.”

  아쉬워하며 교실로 가는데 동준이 뒤따라오면서 계속 졸라댔다.

  “가자, 우리 가자, 응?”

  “우리 좋아하시네. 네가 왜 우리랑 우리냐?”

  “우리가 우리지, 그럼 우리가 남이냐.”

  “말장난하지 말고 좋은 말할 때 빠지라고 했지? 다혜가 안 된다고 하잖아.”

  “왜 안돼, 다훈이도 데리고 가면 되지.”

  우리는 동시에 동준을 바라보았다.

  “다훈이 데리고 다니려면 힘들어. 얼마나 에너지가 넘치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장난 아니야.”

  “넘치는 에너지는 발산해야지. 그때그때 터뜨려야 이담에 중2병에 안 걸리지. 쌓이고 쌓여서 한꺼번에 폭발하는 게 중2병이잖아. 다훈인 내가 책임질게, 다 같이 가자.”

  다혜는 동준의 제안에 솔깃해서 바라보았다. 나는 동준을 쏘아보며 말했다.

  “싫어. 물 무서워.”

  물이 무섭다는 내 말에 유리는 내 눈치만 살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터키행진곡 덕분에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워터파크는 사진이나 텔레비전에서만 봤다. 워터파크는커녕 목욕탕이나 수영장도 가보지 못했다. 그곳은 어떻게 생겼을까, 집에 있는 욕조의 몇 배쯤 되는 크기일까, 도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가족과 여행 중이라며 유리가 일본의 노천탕 사진을 보낸 적이 있었다. 파란 하늘에는 페스츄리처럼 물결을 이룬 구름이 떠 있고, 나무들로 빼곡하게 둘러싸인 숲속 바위틈에 노천탕이 있었다. 노천탕엔 구름이 짙게 내려앉아, 마치 유리가 하늘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뭇가지엔 눈과 서리가 얼어붙어 하얗게 반짝였다. 상고대라고 했다. 초록의 나무와 은빛 상고대가 함께 있는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노천탕 안에서 유리가 환하게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또 다른 사진에는 유리가 탕 모서리에 발을 높이 올리고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유리의 발이 눈처럼 희었다. 빨갛게 페디큐어를 하고 은색 별을 붙인 발톱이 도드라지게 반짝였다. 다시 내 새끼발가락이, 내 마음이 오그라들었다. 5교시 수업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열 개의 빨간 발톱이 점점 커져서 머릿속이 온통 빨갛게 물들고 은색 별이 자꾸 반짝였다. 수업이 끝나는 걸 알리는 터키행진곡 한 음, 한 음에서도 은색 별이 후드득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설주야, 가자~ 응? ㅋㅋ

  -무서우면 내가 꼭 안아줄게. 가자아아앙~

  -물엔 안 들어가도 돼. 너 청룡 열차 좋아하잖아. 물 위를 살짝 스치는 아마존 보트만 타도 되고. ㅠㅠ

  잠자리에 누웠는데 다혜가 계속 톡을 보내며 졸라댔다. 난 가고 싶은 생각이 솟아오르다가도 은색 별이 자꾸 반짝이는 바람에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다훈이 워터파크 한 번도 못 가봤어. 이 기회에 데려가고 싶어. 설주야, 제발!

  다훈이 워터파크 한 번도 못 가봤다는 말에 나는 이모티콘을 클릭하고야 말았다. 토끼가 두 손을 번쩍 들고 OK! 라고 외치는 임티였다. 나는 바로 쇼핑 사이트로 들어갔다. 샌들을 사야 했다. 앞이 트여 발가락이 훤하게 드러나는 샌들을 보니 다시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톡방으로 들어가서 ‘아무래도 못 가겠어. 쏘리, 쏘리.’라고 썼다. 그리고 보낼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잠이 들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새로운 단톡방이 만들어져 있었다. 동준이와 환유까지 초대한 ‘워터파크gogo’ 방이었다.

  -앗싸, 설주도 간단다. 언제 갈까? ㅋㅋ

  -주말은 사람 많으니까 평일에, 8월 9일. ^!^

  -좋아, 내가 온갖 할인권 다 끌어모아서 입장권 예매할게. 이 방면엔 내가 고수 아니냐. ㅋㅋ

  온갖 이모티콘이 춤추며 빙글빙글 돌고, 이단 옆차기와 앞구르기를 하며 꿈에 부풀어 있었다. 여기에 내가 찬물을 끼얹기에는 이미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마음 한편에선 내가 나를 유혹하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앞으로도 워터파크는커녕 수영장도 가지 않고 살 거야? 이 기회에 가봐. 궁금하지 않니? 부럽지 않아?’

  난 다시 쇼핑 사이트로 들어갔다. 샌들이 이렇게 다양하다니, 열 발가락이 훤하게 드러나는 샌들들, 색상도 알록달록, 디자인도 조금씩 다 달랐다. 내 여덟 개의 발가락을 감출 수 있을 만한 걸 찾아보았다. 그중에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있었다. 파란 바탕에 셋째와 넷째와 새끼발가락이 들어갈 자리에 커다랗고 샛노란 해바라기가 피어있었다. 오호, 이런 샌들도 있었네, 발가락을 충분하게 감출 수 있을 만큼 해바라기는 커다랬다. 나는 얼른 ‘바로 구매’를 클릭했다.      


     

  날씨가 좋아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우리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워터파크에 도착했다. 평일인데도 방학이 시작돼서인지 줄이 길게 이어졌다. 우린 인터넷 예매를 해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훈은 동준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듯이 걸어 다녔다. 다혜는 손을 놓으면 안 된다고, 수십 번도 넘을 정도로 잔소리에 잔소리를 보탰다.

  “다혜 왜 저래?”

  “우리 엄마보다 잔소리가 더 심하다.”

  “잔소리가 정말 사랑인가요, 다혜 씨.”

  우리는 킥킥거리며 놀렸으나 다혜는 꿋꿋했다. 음료수 흘리지 마라, 버스 좌석에서 발로 앞자리 차지 마라,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하지 마라, 고막에 상처가 날 지경이었다. 마치 우리 엄마를 보는 것 같았다.

  새삼 다혜가 달리 보였다. 새침하게 앉아서 딱 자기 할 일만 하던 다혜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니, 가까이 지낼수록 의외인 부분이 너무 많았다. 과자 부스러기가 입가에 조금만 묻어도 닦아주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면 가지런하게 빗기고, 계속 목마르지 않냐며 묻고, 옷에 먼지 한 톨도 없는데 털어주고……. 동준이가 손을 꼭 잡고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다혜의 잔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내 컨디션은 완벽했다. 청반바지에 노란 크롭 티셔츠를 입고, 파란 샌들에 샛노란 해바라기까지 달려있으니 옷차림도 완벽했다. 게다가 해바라기 덕분에 새끼발가락이 보이지 않으니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바람이 넘나들어 걸음이 날아다닐 듯 가벼웠다.

  “넌 나와서도 터키행진곡을 흥얼거리냐, 지겹지도 않아?”

  “큭큭, 나도 모르게 중독됐나 봐.”

  “설주 너, 노랑 깔맞춤이구나!”

  “너도 못지않구먼, 핑크 공주님!”

  “다혠 동생과 초록 스트라이프 커플티, 다훈이 잃어버려도 금방 찾을 수 있겠어.”

  “어딜 가나 옷 타령은, 우리 누나도 외출하려면 옷을 몇 번씩 입었다 벗었다 하는지, 내가 보긴 다 거기서 거기구먼.”

  “어떻게 거기서 거기냐? 네가 그 한 끗 차이를 볼 줄 모르는 거지.”

  동준은 툴툴대면서도 다훈을 잘 보살피고, 환유는 의젓하게 우리가 흘린 물건들을 챙기곤 했다. 우린 날씨만큼이나 환상의 팀이었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아마존 보트는 무서워서 꺅꺅 소리를 지르고 연신 물벼락을 맞았지만, 또 타고 싶었다. 파도 풀도 대박 감동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풀로 뛰어 들어갔다. 밀려오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니 감동이 마구마구 밀려들었다. 파도는 나를 모래밭에 내동댕이쳤다가 다시 파도 위로 데려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입안으로 물이 왈칵 밀려 들어와도 즐겁기만 했다.

  “설주, 쟤 왜 저래, 안 온다고 뺄 땐 언제고, 완전 혼자 신났구먼.”

  친구들의 핀잔도 들리지 않았다. 점심은 돈가스와 피자로 빵빵하게 먹은 후 돗자리를 펴고 누웠다. 하늘이 새파랬다. 내가 본 하늘 중 가장 투명한 파랑, 파도처럼 넘실대는 파랑에 눈이 부셔 잠깐 눈을 감았더니 온몸이 따뜻한 햇볕에 노글노글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다혜는 감기 걸리면 안 된다며, 싫다는 다훈이에게 티셔츠를 껴입히느라 애쓰고 있었다.

  “설주야, 화장실 안 갈래? 우린 화장실 가니까 다훈이 좀 보고 있어.”

  “응, 응, 으음…….”

  나는 다훈이 종알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누워있었다. 소리가 점점 멀리 아득해지며 잠깐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다훈이 어딨어?”

  다혜의 날 선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분명 종알거리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었는데…….

  “다훈이 어디 갔냐고?”

  네 사람이 나를 바라보며 다그치고 있었다. 다혜는 아직 조심해야 한다던 발까지 세게 굴러대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대로 땅속으로 꺼져버리거나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두 당황하여 쩔쩔매는데 환유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다혜는 여기서 기다려, 동생이 여기로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난 다훈이 찾는 방송을 신청할게. 너희 셋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서 찾아봐.”

  다혜는 이미 얼굴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번들번들했다. 나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환유가, 넌 저쪽으로 가보라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세상이 천천히, 빙빙 돌아갔다. 초록 스트라이프 티셔츠, 초록, 초록, 초록, 줄무늬, 계속 중얼거리며 방향도 못 잡고 그저 맴돌기만 했다. 사람들이 모두 초록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초록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다섯 살, 이다훈을 찾고 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때, 앞에 선명한 초록색 스트라이프 티셔츠가 보였다.

  “혼자 가면 어떡해?”

  나는 달려가서 다훈을 껴안았다. 곧이어 앙칼진 여자 목소리와 함께 남자가 내 팔을 꺾다시피 하며 날 떼어내려고 했다. 난 다훈을 뺏기지 않으려고 더욱, 더욱 꼭 끌어안았다.

  “뭐야, 왜 우리 아일 끌어안아? 아이가 울잖아!”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난 그제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이는 줄무늬가 아니라 그냥 초록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동생을 잃어버렸니? 부모님은 함께 안 왔어?”

  나를 밀어내던 남자가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의 얼굴이 눈물로 뿌옇게 보이는데, 이다훈을 찾는다는 방송이 연거푸 흘러나왔다. 남자가 갑자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초록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다섯 살 남자아이를 잃어버렸어요!”

  사람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의, 메아리의,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초록, 줄무늬, 스트라이프, 다섯 살, 남자아이라고 하는 소리가 웅성웅성 들렸다. 나는 목이 메어서 다훈아,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자꾸 눈물만 흘렀다. 시간은……, 시간이……, 시간을……, 십 분만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난 뭐든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방송에서도 계속 초록 줄무늬 티셔츠를 찾고 있었다.

  “저기, 핫도그랑 아이스크림 파는 푸드트럭 있잖아요. 거기서 방금 그런 남자아이 본 것 같은데…….”

  지나가던 여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남자가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서 뛰었다. 숨이 차올라 정수리가 후끈후끈하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푸드트럭 앞에 초록 줄무늬 티셔츠가 보였다. 나는 달려가서 다훈을 껴안았다.

  “혼자 왜 여기까지 왔어?”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하니까 누나가 응, 으응, 하면서 잠만 잤잖아. 그래서 우리 누나 찾으러 왔지.”

  나는 얼른 아이스크림을 사서 다훈에게 쥐여주었다. 그러나 정신이 홀딱 나가서 남자에게는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다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혜는 대답도 없이 계속 흐느끼기만 했다.

  돌아가면서 어림짐작해 보니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다훈을 보자 다혜는 동생을 껴안고 계속 볼을 비벼댔다. 나는 돗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다혜는 다훈이 입을 닦아주고 옷도 털어주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다훈은 왜들 이러지?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다혜야, 미안해.”

  나는 목이 메어서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다혜의 대꾸가 없어 난 다시 사과했으나 다혜는 다훈이만 쓰다듬으며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단단하게 화가 난 것 같았다. 내가 다혜였다면, 나라도 그럴 것 같아서 무슨 말을 더할 수도 없었다. 다훈을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앉은 우리의 거리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어? 누나, 발가락이 왜 그래?”

  깜짝 놀라서 내려다보니, 왼쪽 샌들이 없었다. 아……, 아까 다훈이 찾으러 푸드트럭으로 달려갈 때……. 다혜의 시선이 내 왼쪽 발에 꽂혔다. 놀란 표정을 애써 숨기려는 것이 훤하게 보였다.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앉아 있었다.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야야, 찾아서 정말 다행이다.”

  세 사람은 서로 “너 보고 보랬잖아.”, “네가 본다고 했잖아.”, 티격태격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샌들을 신은 오른발을 얼른 왼쪽 새끼발가락 위로 포개었다. 그새 유리는 내 발가락을 보았는지, 내 발과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게 느껴졌다. 공연한 자격지심인가…….

  동준이 한심하다는 듯 나에게 물었다.

  “설주야, 넌 또 왜 우냐?”

  “저기, 설주 누나, 발…….”

  다혜가 재빠르게 다훈의 입을 아이스크림으로 틀어막았다. 다훈의 입가가 아이스크림으로 범벅이 되었다.

  “설주가 새로 산 샌들 잃어버렸다고 울고불고 난리다. 너희가 좀 찾아봐라. 저쪽에서 왔으니까 거기 어디쯤 떨어져 있을 것 같은데.”

  갑자기 다혜가 화장실에 가겠다며 동생의 손을 잡아당겼다. 다훈은 싫다고 칭얼거렸지만, 다혜는 입이랑 손을 씻어야 한다며 억지로 끌듯이 데리고 갔다. 동준은 짜증 난다고 투덜대면서도 환유와 함께 금방 찾아서 돌아왔다. 동준은 샌들을 내 발밑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깟 일로 울고불고 난리냐? 아침부터 깔맞춤이 어쩌고 난리더니.”

  나는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냉큼 샌들을 신었다. 내 발가락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건지, 못 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서운하다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리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자꾸 딴청을 피우는 듯했다. 그렇다고 내 발가락을 봤냐고 물어보기도 뻘쭘했다.

  “이젠 달맞이 열차만 타면 끝이다. 고고!”

  달맞이 열차는 언덕 위에 있어서 조금 걸어 올라가야 했다. 열차가 맨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달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서 달맞이 열차라 부른다고 했다. 혹시 낮달을 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보지 못했다. 열차를 탄 후 걸어 내려올 때는 너무 피곤해서 이대로 쓱, 집으로 순간 이동하고 싶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다훈이 잠이 들어서 동준이 안고 탔다. 유리가 환유와 나란히 앉게 되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다혜와 함께 앉았다. 말을 걸기가 머쓱하여 눈을 감고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었다. 이 와중에도 얼마나 곤히 잤는지, 내가 코 고는 소리에 내가 깜짝 놀라서 깼다. 다시 조느라고 고개가 자꾸 앞으로 꺾이는데 다혜가 손을 뻗어 목을 받쳐주었다. 나는 자는 척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다혜의 손길은 말랑말랑하고 따뜻했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하늘을 보니 푸르스름한 반달이 걸려 있었다.

  “아까 못 본 달이 여기에 있네.”

  “같이 다니기 정말 힘들다. 낮에도 달, 달, 하더니 또 달 타령이냐.”

  “둔한 남자들이 여자의 섬세한 감성을 어찌 알겠느냐.”

  “그래, 그래, 섬세한 감성에 지쳐 졸도할 지경이다. 다신 너희와 어디 안 간다. 정말 하루가 버라이어티했다.”

  “나도 다신 함께 가고 싶은 마음 눈곱만큼도 없다.”

  “어쩐 일로 설주가 조용하냐. 다훈이 때문에 영혼이 아직도 안드로메다를 헤매는 거야?”

  나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속 무거운 짐 하나가 툭 떨어져 나간 것처럼 홀가분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준이까지 알게 되면 문설주라고 놀렸던 것보다 더 놀려댈 텐데, 혹시 내 앞에서 펭귄처럼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건 아닐까……. 축 처져서 걷고 있는데 동준이 내 팔을 툭 치면서 말했다.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하하, 이게 우리 집 가훈이다.”

  항상 유쾌한 모습을 바라보며, 양동준 마음에는 새끼발가락 같은 ‘내면아이’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운주병원에 갔을 때, 상담실에서 나오며 왜 눈시울을 붉혔을까. 나는 동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았다. 동준은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르며 걸어갔다.     


  나는아직도중2♬태어날때부터사춘기♬

  정7각형선을밟고♬영원히성장이멈췄지♬     


  동준이 마치 달을 향하여, 달을 따라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8     

  얼마나 잤을까, 배가 사르사르 사르륵. 피비야, 지금 나는 KTX를 타고 달리는 중이야. 다시 잠을 청해 보려는데 이번엔 뾰족한 물체가 배를 콕콕. 아아, 뭔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 이 긴박한 신호는, 아, 아, 안돼! 목구멍으로 부풀어 오르던 느낌이 다시 내려, 아래로 내려가. 밑으로, 밑으로, 밑으로. 나는 빛의 속도로 화장실을 향해 달려. 변기에 앉자마자……, 피비야, 0.1초만 늦었어도…….

  화장실에서 나와 좁은 통로를 걸어가고 있어. 내 좌석 건너편에서 한 남자가 일어나네. 나처럼 화장실에 가려나 봐. 나는 몸을 최대한 한쪽으로 붙여서 남자가 지나갈 길을 내어 줘. 남자도 최대한 반대편으로 붙여서 내 옆을 스쳐 지나가. 무의식에 불이 반짝반짝. 고개를 들어보니 검정 마스크야. 금테 안경의 모서리도 반짝. 나도 모르게 남자의 옷소매를 잡아. 남자는 뭐야? 하는 눈초리로 바라봐. 그리고 내 손을 뿌리쳐. 나는 다시 옷자락을 움켜쥐어. 남자가 나를 거세게 밀쳐내. 나는 남자의 팔을 꽉 꽉 꽉 잡아.

  브, 블, 블랙이야

  내 고함에 잠에서 깬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블랙이라고?

  뭐? 블랙?

  녹음했지? 녹음한 거 당장 내놔!

  2학년 2반 교실에 몰래 침입했잖아!

  양동이와 환유가 동시에 달려들어서 남자의 멱살을 잡아. 다혜는 남자의 백팩을 잡고 늘어져. 나는 여전히 남자의 팔을 놓지 않아. 이 와중에도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

  중2? 요즘 중2들 정말 무섭다니까.

  왜들 저래, 개념은 밥 말아 드셨나?

  뭘 돕는다고 설쳐? 어설프게 돕다가 사건에 휘말리면 우리만 손해야. 가만히 앉아 있어. 중2병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기나 해? 코로나보다 더 무섭다고!

  남자가 거세게 다시 나를 밀어. 나는 바닥에 쓰러지며 나뒹굴어. 그제야 승객들이 승무원을 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피비야, 영화에서 천천히 화면이 어두워지듯 내 눈앞의 모든 것이 블랙, 블랙이야. 페이드아웃, 이어지는 완벽한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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