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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미 Sep 23. 2024

태어날 때부터 사춘기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사흘 전, 드디어 블랙과 함께 동영상을 촬영하기로 약속한 날이 되었다. 우린 아침 일찍 교실에서 모였다. 멋진 장소를 알아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블랙은 학교보다 더 좋은 무대는 없다며 교실과 복도와 운동장 등을 추천했다. 모두 흰 셔츠에 청바지나 청치마를 입고 그 밖에 모자와 신발, 액세서리 등은 자유롭게 꾸미기로 했다. 셔츠에 반짝이는 스티커를 붙이는가 하면, 머리엔 초록 뿔을 달고, 도깨비 복면이나 좋아하는 아이돌 가면을 쓰고, 청치마에 빨간 반짝이 스타킹을 신기도 했다.

  나는 밑단을 찢은 청반바지를 입고 색색의 레이를 목에 걸었다. 그리고 정말 하와이의 무희라도 된 듯 어깨를 들썩이면서 차례를 기다렸다. 새끼발가락도 자연스럽게 리듬에 맞춰 꼼지락거리면서도 긴장했는지,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것 같았다. 나는 블랙의 중2 시절을 떠올리고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용기를 내려 애썼다.

  블랙은 어렸을 때부터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고 했다. 자신이 하려는 말을 사람들이 끝까지 들어주지 않고 가로채며 무시하여 점점 더 말하기가 두려웠다고, 그래서 우릴 마주칠 때마다 도망갔다고 고백했다. 그럴 때마다 블랙은 하고 싶은 말을 노랫말로 지어 마음을 드러냈다며 작사한 노래의 유튜브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악마의 속삭임이라며 흥얼거리던 노래도 블랙이 지은 노랫말임을 알게 되었다. 이어서 우린 유튜브를 보며 계속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내가 좋아하는 이 노래 가사를? 드라마 OST인 이 노래도? 헐, 이것도!

  블랙은 작사할 때면 교실이나 음악실 또는 운동장에서 멍 때리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그곳에선 중2였던, 아무도 자기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던 외톨이의 쓸쓸함과 반항적인 영혼을 만날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가 간디도 어리 린 시저 절에 하 항 사 상 뛰어다녀 녔대. 마 마 말으 을 자 잘 모 못하느 는데 누가 자기에게 마 마 말 거 걸까봐 그래 랬대.”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동안 블랙의 행적과 소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블랙은 말은 어눌했으나 행동은 날쌘돌이였다. 블랙은 초록 테이프로 복도의 마룻바닥에 우리의 동선을 재빠르게 그었다. 래퍼, 팝핀, 난타 자리 등도 테이프로 표시했다. 그리고 더듬거리면서도 각자의 역할을 정확하게 짚어주었다. 자꾸 듣다 보니 블랙의 말투와 몸짓에는 묘한 리듬감이 있었다. 주로 받침 있는 단어의 발음을 더듬었는데 그건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았다.

  “위치 자 자 잘 이 익혀, 초 로 록 테이프와 스티커는 촤 촤 촬 여 영하 할 때 뜨 뜨 뜯으 으을 거니까 우와 왕좌와 왕 말고.”

  “자, 바 반주 시작, 미 민규와 유 윤저 정이가 나와, 서두르지 마, 카메라 의 시 식하지 마 말고 무시 시 심한 듯, 시크하게.”

  이해인이 등장하다가 퇴장하는 민규와 부딪히자 블랙은 다시 동선을 정리해 주었다.

  “서로 부디 딪히 며 면 자여 연스러 러 럽게 하이파이브 해.”

  “해이 인이는 조 좀 거드 들머 먹거려.”

  블랙은 정말 건달처럼 건들건들 걷는 연기를 보여줬다. 블랙은 점점 더 흥이 오르는지 래퍼들과 등·퇴장을 함께 하며 무대를 채워나갔다.

  “수혀니 자 잘 나난 처 척 조 좀, 세사 상에서 내가 제이 일 자 잘 나가, 내 미 밑에 다드 들 꾸 꾸 꿇어, 이러 런 느끼 낌, 아 알지?”

  “여기서 다 가 같이 추이 임새와 하 함께 워 원재 드 등자 자 장.”

  “워 원재 와 완 저 전 프로네, 와 와 완벼 벽해, 우리 배 밴드에서 스카우트해야, 와우, 대바 박, 브라비!”

  우리는 박원재의 팝핀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지난번 시범으로 보여준 건 새 발의 피였다. 원재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작고 소심한 박원재가 아니었다. 우리는 팝핀 원재를 작은 거인이라고 부르며 추켜세웠다. 원재는 쑥스럽다는 듯 씩 웃기만 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양말을 벗어 던지고 왼발로 하이킥을 날리며 보라색 조명 안으로 들어섰다. 예서가 고개를 까딱이며 시그널을 보내자 나는 랩을 시작했다.     


  공부해라♬또잔소리♬어른들의♬망언♬

  불만반항♬허풍허세♬우리들의♬특권♬     


  너는나비♬나는번데기♬번데기앞에서♬주름잡지마♬

  너는독수리♬나는야참새♬참새앞에서♬짹짹대지마♬     


  이어서 여진과 박희장 등 래퍼들이 차례대로 등장해 자신의 끼를 마음껏 발산했다. 몇몇은 슬릭백을 하며 등·퇴장을 하기도 했다. 래퍼들과 반주자 예서, 팝핀 원재를 제외한 아이들은 소고, 트라이앵글, 탬버린 등을 연주했다. 난타 팀은 선생님이 맡았는데 선생님은 피에로 분장을 하고 큰북을 두드렸다. 난타 팀과 랩 팀이 나뉘어서 연습하고 난 뒤 다시 모여서 마지막으로 함께 맞춰보았다.

  리허설 때는 비포vs애프터가 완전 다른 사람인 듯 바뀌어 있었다. 우리는 교실을 벗어나 복도, 운동장, 체육관, 음악실, 미술실, 도서실 등에서도 장면을 쪼개어 여러 번 반복하여 촬영했다. 촬영은 이도안이 맡았다. 평소 도련님처럼 의젓하여 이도령이라라고 불리던 도안이는, 마치 프로 카메라맨이라도 된 듯이 으스대며 숨겼던 재주를 드러냈다. 다혜 엄마 말처럼 좋아하는 것이 재능이라면, 다들 마음속 깊은 곳에 재능 하나씩은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공동작업의 시너지 효과와 박원재, 최예서, 거기다가 블랙의 감각이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음악과 춤은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자유롭기만 한 줄 알았는데, 여기에도 계산된 규칙과 보이지 않는 약속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블랙은 껄렁해 보이면서도 치밀했다.

  “블랙은 옷도 안 갈아입어요? 매일 그 옷만 입어요?

  ”내 오 옷 으 은 모두 브 블 블랙. 이 오 옷도 세 버 벌이나 더 이 있어.“

  “블랙은 몇 살이에요?”

  우리가 나이를 묻자 블랙은 더듬거리면서도 랩으로 답했다.    

 

   나는아직도중2♬태어날때부터사춘기♬

   정7각형선을밟고♬영원히성장이멈췄지♬


  문득, 오늘 하루 내내 맨발로 지냈는데 아무도 내 발가락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맨발로 춤을 추고, 맨발로 교실 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간식을 먹고, 맨발로 복도를 돌아다녔는데……. 나조차 내가 맨발이란 걸 잊고 있었다. 그나마 동준이 내 발톱에 붙인 빨간 별 스티커를 보고는 “야, 넌 발톱에도 다꾸하냐?”라고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그게 다였다. 정말 섭섭할 정도로 그게 전부였다.

  돌이켜 보니 나는 발가락이 남과 다르다는 사실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게 되는 것을 더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타인에게 서운할 정도로 관심이 없다는 사실, 그나마 있는 병아리 눈곱만큼의 관심조차도 곧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드디어 나는 발가락에서 해방된 걸까, 아니면 발가락이 나에게서 해방된 것일까. 이러다가도 지금 이 해방감을 까맣게 잊고 ‘다혜야, 유리야, 내 발가락이 말이야…….’ 언제 이렇게 또 징징댈지도 모른다.   

 


           

       #13     

  나는 꿈을 꿔, 잠들지 않아도 꿈을 꿔. 피비야, 마법의 주문만 외우면 나는 꿈속의 시간으로 이동해.    

 

  나는아직도중2♬태어날때부터사춘기♬

  정7각형선을밟고♬영원히성장이멈췄지♬     


  내 시간은 마법과 괴담, 망상으로 가득 차 있어. 나는 매일매일의 시간을 다이어리에 저장하지. 팔천칠백육십 시간을 꾹꾹 눌러 담은 다이어리야. 언젠간 이 시간들을 되돌릴 수 있는 날이 꼭 올 거야.

  일기를 쓰다 보면 문득 별이 보고 싶곤 해. 이럴 때 내 마음은 방바닥을 살금살금, 살금살금 기어서 집 밖으로 나가. 마음이 먼저 빠져나가면 몸은 저절로 따라가지. 엄마는 이 시간엔 절대로 나가면 안 된다고 해. 하지만 마음이 먼저 나가서 기다리는 걸 어떡해.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어. 몸이 어떻게 따라가냐고? 그건 마법의 주문이 필요하지. 마법을 걸면 전기처럼 짜릿한 전율이 내 몸을 통과해. 그러면 나는 어느새 그네 위에 앉아 흔들 흔들 흔들, 꿈을 꾸고 있어.

  이 세상에 멈춰 선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해. 그런데 내 마음 한 조각은 영원히 중2에 머물러 있을 것 같아. 그건 아직 중2병의 정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야. 피비야, 답을 찾아야 해. 그러나 그건 아무도 모를, 영원히 끝나지 않을 돌림노래인지도 몰라. 지금도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어. 모두 잠든 이 시간에도 말이야.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오려고 해. 난 그걸 느낄 수 있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지구가 돌아, 돌아오고 있어. 같은 지점으로 돌아오는 것 같지만 그건 아니야. 처음에 출발했던 그 시간은 절대 아니지. 곧 나의 중2는 지나가고 시간은 새날을 가리킬 거야. 회전 숫자판처럼 빙글빙글 돌아 새날이 시작되는 거지. 그럼 딸깍, 소리가 날 거야. 피비야, 잘 들어 봐. 아주 잘 귀 기울여야 들을 수 있어. 자칫하다간 소중한 기회를 놓칠지도 몰라. 딸깍, 소리가 나를 다른 시간으로 데려다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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